[전민용의 북카페 -56]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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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56]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전민용
  • 승인 2012.04.2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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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다산 책방

 

영화 ‘건축학 개론’같은 첫 사랑이 있다면 그 때의 상황이나 대화, 과정이 얼마나 기억이 나는지 생각해 보자. 고교 시절에 썼던 일기를 최근에 읽고 그 생소함과 유치함에 실소를 머금었던 일이 있다. 초중고 동창생들을 만나면 서로 엇갈리고 있는 기억들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엄청나게 후회스럽거나 부끄러운 기억은 없는지? 자의든 아니든 큰 상처를 준 기억은? 생리학적으로 기억은 구성된다고 한다. 일어났던 일을 잊는 건 물론이고 없었던 일도 기억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다. 기억에 관한 주관적인 확신과 정확도 간에는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개인의 과거가 기억이라면 집단의 과거는 역사이다. 소설 속 역사수업에서 역사에 대한 토론 장면이 나온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다.” “그런 생각은 패자들의 자기기만은 아닌가?” “역사는 죽자고 반복하는 생 양파샌드위치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마지막 말은 소설의 중요 인물인 에이드리언의 발언이고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소설의 1/4 정도는 토니의 젊은 시절이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토니, 엘릭스, 콜린과 전학생 에이드리언의 고교 시절이 그려진다. 생각이 깊고 공부도 잘하는 에이드리언과 이들은 단짝친구가 된다. 넷 다 대학에 들어가고 그 중 에이드리언은 장학생으로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생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대생과 통상의 연인 관계로 사귀다 1년쯤 후에 헤어진다. 한 참 후에 토니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베로니카와 사귀고 있고 양해해 주길 바란다는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받는다. 토니는 기분 나쁘지만 에이드리언에게 몇 가지 충고와 비난을 하고 그들을 깨끗이 잊기로 한다. 오랜 여행 후에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남아있는 세 친구는 에이드리언을 기리며 몇 번 만나지만 각자 자기의 삶으로 흩어져 간다.

소설의 화자인 토니 웹스터는 소심하고 다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결혼하고 딸을 낳고 이혼도 하고 정년퇴직하여 싱글로 평온한 인생의 말년을 보낸다. 대학 시절 1년 정도 사귀었던 여자 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500 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를 토니에게 유산으로 남기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돈과 문서는 옛 친구 에이드리언의 것이었다. 500파운드와 문서 하나는 곧 받지만 다른 하나의 문서는 베로니카가 가지고 있으면서 인도를 거부 한다. 문서를 받기 위해 베로니카와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이고, 베로니카와 다시 만나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자기가 과거에 보냈던 편지를 다시 받아 읽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의 일부를 보면서 점차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 소설은 기억과 망각과 왜곡과 혼란과 뒤늦은 후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 반전이 기가 막히다. 끝까지 읽은 후 아니, 가끔 중간에도 무심코 지나간 앞부분을 다시 들쳐보게 만든다. 잘 짜인 구성과 읽는 재미를 겸비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알려진 맨부커상을 2011년에 받았다. 그는 ‘전후 영국이 낳은 가장 지성적이고 재기 넘치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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