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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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역사
  • 유동기
  • 승인 2013.04.2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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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기 원장의 『마키아벨리 로마사이야기』⑧

 

인간의 역사에서 신흥종교가 출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신의 영향력을 고려해 기존 종교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실례로 그리스도교는 이교도의 모든 제도와 의식, 심지어 고대 신학자의 기록까지 모조리 없앴다. 게다가 이교도 중의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추억까지 철저히 소멸시켰다.

시인과 역사가들의 작품을 불살라 없애고 초상을 파괴했으며 그 밖에도 고대를 연상시키는 물건은 무엇이든 없애버렸다. 거기에 새로운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해 새로운 계율을 썼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모든 것이 망각의 강을 건넜다.

이 그리스도가 이교도에 대해 행한 일은 그 이교도가 전에 있었던 다른 종파에 대해 행했던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종교는 5~6천 년 동안 두세 차례 변혁을 겪으면서 기록들의 대다수가 소멸되었고 몇 가지 남아 있더라도 정확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홍수, 페스트, 기근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를 겪은 다음에는 이전의 역사나 문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올바르게 전할 사람들이 없어지고 일부의 지식인에 의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개작되기도 한다.

디오도로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시대에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그리스 역사가인데, 30년에 걸쳐 그리스와 로마의 사적을 찾아 <사적유취>라는 40권의 역사서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관계없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이론가들은 거의 모두 그를 배격하였다.

종교를 떠나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송도(松都)를 지나가다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짜리 기와인들 남아 있더냐? 초석 돌 하나 남아 있더냐.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다. 만월대는 멀지 않은 고려조의 궁궐인데 무슨 병화(兵火)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 같이 무정한 유허(遺墟)만 남았느냐? 이와 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을 수 없고 평야에서 고구려의 구형(舊型)을 볼 수 없는 실정이다. 후에 일어난 왕조가 앞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 유물을 파괴하고 없앤 탓이다”라고 탄식하면서 역사에 쓰일 재료가 빈약하게 된 이유를 설파했다.

군주국이든 공화국이든 국가의 멸망을 방지하기 위해서 종교상의 의식을 통해 형성되는 경신(敬神)의 미풍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태어난 근본인 종교가 사고의 근원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이든 중요한 제도와 함께 기본적인 생활의 주된 원리의 근간을 이룬다. 또한, 국민을 일치단결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이기도 하다.

로마가 그리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민회를 열거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할 때, 군대가 전장에 나갈 때 등 정치적이든 군사적이든 모든 중요한 국무를 집행할 때는 반드시 점을 쳤다.

한 예로 적을 공격하기 전에 새 점을 치는데 닭이 모이를 잘 쪼아 먹으면 대길(大吉)이라고 병사들이 확신을 가지고 싸웠고 반대로 모이를 먹으려 하지 않으면 싸우는 것을 중지하였다.

중세 교회는 샤를대제(AD. 742~814년)의 도움을 얻어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던 롬바르디아 세력을 몰아냈고, 프랑스인의 원조를 통해 베네치아인의 권세를 빼앗고, 그 다음에는 스위스인을 이용하여 프랑스인을 물리쳤다.

이처럼 교회와 정부나 왕권 두 세력이 지배함으로써 국가의 일치단결을 할 수 없어 행복해질 수 없었다. 한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한 것이다.

유동기(유동기치과, 동작구치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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