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치과계가 민주적인 사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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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치과계가 민주적인 사회입니까?”
  • 강민홍 기자
  • 승인 2014.04.17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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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⑥ 대한치과의사협회 이상훈 29대 협회장 후보…“당당히 '노'라고 말하기 위해선 우리의 힘을 결집시켜야”

 

3월 6일 저녁 7시 구로역 앞 현대백화점 11층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아직 본격적인 선거운동기간 전이라 나름 여유는 있었지만, 막판까지 바이스 후보 잡기에 애를 먹고 있음에도 평일 저녁시간을 흔쾌히 내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성적인 ‘문학 소년’의 학생운동기

전민용(이하 전)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스 구성에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는데, 잘 되고 있나요?

이상훈(이하 이) : 이상훈 하면 변화와 개혁을 떠올려야 하는데, 그러한 이미지의 바이스 후보를 모시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잘 됐습니다. 다음주 화요일에 부회장 후보님들과 함께 희망콘서트를 해요. 바이스 발표부터 기존 선거판의 틀을 깨는 참신한 선거운동을 만들어 보려구요. 기대해주세요.

 
전 : 자! 살아온 얘기부터 해보죠. 소년 이상훈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 : 충북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치과의사들 대부분 그렇듯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죠. 성격도 내성적이었고. 특별히 소년기나 청소년기에 대해 말할 게 없네요.

전 : 치과대학을 가게 된 계기는요?

이 : 음..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것같아요. 그림도 잘 그렸구요. 그림은 우리 형제들 모두 잘 그렸어요. 아예 그림을 전공한 형제가 있을 정도로요. 전 글을 쓰는 거라던가 창작을 좋아했고, 연극이나 방송 피디? 이런 것들을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문과였죠. 신방과나 국문과에 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잖아요. 공부를 잘하니, 또 제가 대학에 들어갈 즈음은 유망 직종이었으니, 부모님이 의사가 되길 간절히 바라셨죠. 다행히 당시에는 문과·이과 교차지원에 감점이 없었고….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매우 내성적이었거든요. 사람 배를 가르거나 피를 보는 건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부모님과 치과의사는 피를 안보니까 치과대학에 가기로 합의를 했죠.

하지만 예과 때는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한 학기 다니고 휴학도 하고 방황도 많이 했죠. 방황 끝에 내린 결론은 ‘이 세상에 나에게 어울리는 옷은 있겠지만, 딱 주어진 길은 없다’ 였어요. 그래서 ‘이왕 선택한 이상 도전해 보자’ 마음 먹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다시 1학년으로 들어가서 과대표도 맡고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어요.

 
전 : 그럼 84학번들과 같이 다녔겠네요?

이 : 네. 건치하고는 서울경기지부장을 했던 김동근 선생이나 와이프인 김수진 선생 등하고 굉장히 친하게 지냈어요.

전 :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학생운동을 하셨죠?

이 : 대학 때는 예과 1학년 과대표부터 시작하여, 주로 학생회에서 활동했어요. 서슬퍼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데모 한번 안해본 학생이 어디 있었나요? 저도 자연스레 불의에 저항하고 데모하는 학생이 됐죠.

그렇게 3~4년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는데, 본과 2학년 때가 되니, 주체사상을 학습하기 시작하더라구요. 저는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에 분개했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생각했지, 주체사상 등과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들이 가야할 길이 그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야할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학생운동을 그만뒀죠.

학생운동을 그만 두니 매우 허탈하더라구요. 그래서 의료봉사모임에 가입해서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치과의료 봉사활동에 매진했죠.

그 이후 소아치과 수련을 했고, 경기도 양평에서 공보의 생활을 한 후 아버지가 계신 부천에 개원해 평범한 개원의가 됐어요.

전 : 공부를 열심히 했나 봐요. 그 때는 시험에서 10등 안에 들어야 경기도에 배치됐는데, 저도 남양주에서 공보의를 했는데, 남양주 오려고 정말 시험공부 열심히 했거든요.

이 : 네. 맞습니다. 저도 경기도 배치받으려고 시험공부 열심히 했어요.(웃음)

전 : 작가나 화가의 길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는 안해요?

이 : 음.. 그 쪽 길로 가지는 못했지만, 저의 재능을 펼칠 기회는 많았어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총학생회 차원에서 나오는 민주주보에 만평을 그렸구요. 총학생회에서 축제를 열면 경희대 정문에 20미터 크기의 대형 화첩을 거는데, 제가 미술과 학생과 함께 그리기도 했어요.

치과의사가 되고 나서도 짬짬이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도 몇 년째 경기도치과의사회 기관지인 ‘덴티스트’에 만평을 그리고 있어요. 또 시간이 나면 시를 써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는데, 등단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여러 네티즌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어요.

갈증을 풀 수 있는 통로는 얼마든지 있었고, 또 환자를 보고 열심히 진료했을 때 제 진심을 알아주면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치과의사로 살아가는 것에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 이상훈 후보가 '덴티스트'에 그린 만평.
 
 
전 : 저도 인문학적 감수성이나 사람을 배려하는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협회장의 필수 덕목 중 하나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이 : 동의합니다. 하여튼 저의 치과계바로세우기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600여 편의 글을 올렸는데 그런 글을 쓸 때나 성명서 작성할 때나,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터득한 재능들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전 : 치과에서 기억에 남는 환자는요?

이 : 기억에 남는 환자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진료결과를 가지고 마음고생을 시키는 환자일 거에요. 저도 그런 할머니가 한분 계셨는데, 진심을 가지고 그 분의 마음을 성심성의껏 어루만져주니 나중에 연말엔 케익을 사와서 같이 촛불을 끄며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덴트포토, 불법네트워크치과 그리고…

전 : 지금 치과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 중 한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같아요. 아마 김세영 협회장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이상훈 하면 덴트포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덴트포토와는 어떤 관계에요?

이 : 아무 관계 아니에요. 전 덴트포토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몰라요. 그냥 뒤늦게 덴트포토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뿐이에요.

전 : 그럼 덴트포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죠. 전 순기능을 좀 더 높이 평가해요. 치의들의 일상사에서 게시판 글들을 읽는 게 하나의 좋은 휴식이 되기도 하고, 당장 필요한 정보도 교류하고…. 덴트포토 원래 기능은 임상사진 공유의 장이었잖아요. 지금은 좋은 정보공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한가지는 치과계 현안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이라는 점이에요. 그동안은 공조직에서 회무를 하면 1~2주 후에야 종이신문이 배달이 됐는데, 신세대들은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라 자세히 보지도 않고 심지어 그냥 버리기도 해요.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덴트포토가 치과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데 있어 디딤돌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요?

전 : 또 이상훈 하면 불법네트워크치과 척결이 연상될 수밖에 없는데요. 직접 피해를 받으셨어요?

 
이 : 아뇨. 전 유디나 용플란트 때문에 영향을 받은 적은 없어요.

전 : 자기가 피해를 받은 적도 없는데, 그렇게 열심히 했다?

이 : 음..의무감? 제 삶의 좌우명? 그 정도로 해두죠. 치개협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 중 한 반정도는 그런 분들인 것같아요.

지나고 나서 ‘그때 그럴 걸’ 하면서 후회하는 경우도 있고, ‘할까? 말까?’ 주저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 그런 삶을 살지 말자는 게 좌우명이에요. 옳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하자’는 주의죠. ‘저 아니면 누군가 대신 해주겠지’도 비겁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안하면 남들도 안해요.

전 : (불법네트워크 척결이) 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죠?

이 :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지만 이 땅에 의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전 :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증으로 고생한다고 들었어요. 사모님이 걱정 안하시나요?

이 : 이젠 거의 반포기 상태죠.(웃음) 너무 싫어했다면 못했겠죠. 제가 회무를 십여 년 정도 해 왔는데, 시간을 엄청 뺏기지는 않았어요. 행사 준비 등으로 무척 바쁠 때도 며칠 있었지만, 평상시에는 1달에 공식 회의 한번 정도?

그런데 3년 전에 이 일을 시작하면서는 일주일 3~5번 회의 하느라 늦고, 진료 외에는 자료 정리, 공부 등을 하고…. 집에서는 아무래도…. 미안한 감도 많고 잔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를 해주니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치개협 탄생 이유? 개원의-공조직간 괴리

전 : 많은 분들이 이상훈 하면 그냥 재야인사지 회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해요. 현재 부천시치과의사회 회장이시죠? 회무에 대한 얘기 좀 해주세요.

이 : 반장부터 시작해서 십여 년 동안 회무를 했어요. 부천시치과의사회 회무는 서른 중반에 동문선배의 권유로 보험이사부터 시작했구요. 이후에 경기도치과의사회 자재이사와 기획이사, 치협 자재위원 활동도 했고, 다시 부천분회 부회장을 거쳐 현재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전 :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 이후 활동도 간략히 정리해 주시죠.

이 : 2011년 대한치과개원의협회(이하 치개협)를 창립해 초대회장으로 활동했고, 이후 2012년에는 ‘직선제 쟁취 전국치과의사연합’ 대표를 맡으며 시기상조론으로 머나먼 남의 일처럼 느껴졌던 직선제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원들에게 심어줬습니다. 역시 ‘치과계 바로세우기 비상대책위회’ 위원장을 맡으며 치과계가 나아갈 방향을 한발 앞서 제시해 왔습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29대 협회장 출마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전 : 치개협 활동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죠. 치개협을 만든 배경부터 설명해 주시죠.

이 : 물론 유디치과 문제가 큰 계기였죠. 문제가 터졌는데, 불법네트워크치과 척결에 올인 하겠다고 당선된 김세영 집행부는 화끈하게 나서지도 않고….

그런데 불법 척결을 떠나서 치개협을 만든 이유는 크게 두가지에요. 첫째는 공조직과 일선 개원의간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거에요. 저도 공조직 활동을 하면서 일반 회원들과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공조직에 계시는 분들은 그쪽에만 있다 보니까 개원의들의 입장을 전혀 몰라요.

거꾸로 일선 개원의들도 공조직에 대한 오해가 커요. 공조직에 계시는 분들은 일선 개원의들이 회비도 안되고, 관심도 없고, 지들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 생각하고, 개원의들은 골프대회 같은 거나 하고 돈 함부로 쓴다고 생각하고….

부천에도 경희대동문회가 있는데, 어느 시점부터 후배들이 모임에 안나와요. 경희대 뿐 아니라 타 대학도 마찬가지고, 분회 이사진을 구성할 때 어느 시점부터 이사를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이사진 구성에 애를 먹어요. 공적인 모임에 대한 소속감이나 이런 것에 대해 절실하지 않게 된 거죠.

왜 그럴까요? 어느 시점부터인가 치과가 너무 어렵고, 당장 치과 문닫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매우 절실해졌기 때문에 공조직에 대해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어진 거에요. 그런데 공조직에선 이들을 원망만 하고 있죠. 무관심하다고, 회비 안낸다고. 참여하지 않는다고….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치과계가 두 쪽으로 갈라지겠다 이런 우려를 했고, 그것 때문에 시작하게 된 거에요.

협회장 출마를 결심하게 된 것도 난국 타개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려는 것도 있지만,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갈라지는 것을 막아야 겠다. 치과계 난국 타개를 위해 강력한 하나를 만들어야겠다는 의도가 큽니다.

‘똑같은 회비납부’ 당연한 의무 맞나요?

전 : 그런데 오히려 치개협으로 공조직과 편 가르기가 됐다는 생각도 들고, 실제 대립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나요?

이 : 전 치개협 리더였고, 회원 몇몇의 목소리만 수렴해서 공식적인 입장을 내보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어요. 그만큼 일선 개원의들은 스펙트럼이 넓고 성토가 매우 강해요. 그나마 제가 중간에서 수렴해서 정화를 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요구를 한 겁니다.

물론 대립이나 갈등으로 보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비판과 대안세력이 없으면 독선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잘 된 길로 간다는 보장도 없어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데 있어 반드시 극복해내야 할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

전 : 실제 개원의들의 분노나 치협에 대한 과격한 목소리에 비하면 많이 순화시킨 것이란 말이군요

이 : 정말 울분에 찬 사람들은 무슨 짓이라도 해요. 한의계를 보세요. 회관이랑 협회장실을 밥먹듯 점거하잖아요. 치과의사들이라고 그런 과격한 행동 안하라는 법 있나요? 그러나 전 그런 행동들로 인해 오히려 진정성을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막아왔어요.

전 : 그렇다면 치개협을 창립한 두 번째 이유는 뭔가요?

이 : 치과계는 아직도 온갖 비민주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협회장 선거에서부터, 회비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권리를 박탈당하죠. 어려운 여건의 후배들을 폭넓게 포용하려는 노력이 절실해요.

대표적인 것이 회비입니다. 입회비를 과감히 인하해야 되겠다는 것이 핵심 목표였어요, 입회비를 상징적인 선에서 대폭 낮춰서 다 들어오게 하자. 또 회비도 낮추자. 그래도 좋은 시절을 보낸 선배들이 양보를 좀 하자. 이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치개협을 시작하게 됐어요.

 
전 : 회비 납부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죠. 재작년에 경기지부가 일부 감면해 줬다 역풍을 맞기도 했잖아요.

이 : 회비납부는 기본의무다? 맞아요. 그런데 어려운 젊은 회원들의 입회비 감면에 ‘역차별’ 논리를 들이대는 건 맞나요? 왜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세금은 국민의 당연한 의무죠. 그런데 똑같이 내나요? 누진세, 조세 공평주의를 적용하지 않나요? 가까운 치과기공사회만 해도 기공소장과 패이 기공사들의 회비 액수가 달라요. 우리는 잘나가는 치과 원장이나 못나가는 치과 원장이나 패이닥터나 다 똑같잖아요.

또한 변호사회는 어떤가요? 활동을 하려면 무조건 회비를 내야하지만, 휴면기간 때까지 적용해서 밀린 회비 내라고 하나요? 우리는 면허증 받은 날부터 무조건 정산하잖아요. 여성치의가 출산으로 활동 중단한 기간도 면제해주지 않잖아요. 그 뿐인가요? 지역 바꿀 때마다 입회비 내야 하죠.

한가지 더 얘기할까요? 조금씩은 다르지만 65세 이상은 회비를 면제해 주잖아요. 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에 서치 총회에서 그 연령을 70세로 변경하려 했는데 반발해서 무산됐잖아요. 왜 인가요? 그동안 회비를 많이 냈으니까? 돌려서 아직 자리를 못잡은 젊은 회원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배려해주는 건 왜 안되나요?

일선 개원의 민심을 ‘여론의 중심’으로

전 : 이제 치개협 활동 얘기를 해보죠. 초창기 불법네트워크치과 척결 활동에 매진했는데, 어려움도 많았죠?

이 : 고소도 많이 당했고, 고발도 많이 했어요. 조사를 받으면 끝난 후에 지장을 찍으라고 해요. 생전 처음 피의자 신분이라는 것을 느껴서 묘한 기분이 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경찰서를 하도 여러번 다니다 보니까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져요.(웃음)

한번은 부친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지났을 때였어요. 아침 일찍 중앙지검에서 나오라고 해서 오전만 비우고 가면 끝나겠지 하고 갔는데, 밤 10시가 넘었더라구요. 별빛을 받으며 걸어나오는데, 내가 왜 피의자가 되어서 하루 종일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하고 눈물이 핑 돌더군요. 한달 반 정도 전까지 민사 항소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마무리됐어요.

전 : 변호사 비용 등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이 : 치개협 차원에서 모금운동을 했는데, 1천2백여 분 정도가 참여해주셨고 4억원 정도가 모였어요. 기금은 변호사 비용, 대국민 홍보 일간지 광고 등으로 썼어요.

전 :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치협과 갈등이 있었어요. 너무 ‘강성’이라는 느낌도 받았고. 시위나 소송 등의 방식을 꼭 고집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 그동안 치과계에서 보아오지 못했던 문화, 즉 100명~200명씩 회관 앞에 모여서 입장을 표출하는 문화…. 처음 접하다 보니 괴리감이 느껴졌을 거에요. 그래서 치개협이나 이상훈 하면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돌이켜 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아실 거에요.

직선제만 예로 들면, 2~3번의 의견 표출을 했지만, 전문지에 십여차례 시리즈 캠페인 광고도 했었고, 덴트포토를 통해 여론조사도 하고,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고, 1만5천 회원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시사저널 등 외부 언론에 홍보를 하기도 했어요. 시위는 다양한 활동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그런데 공조직에서는 어땠나요? 시기상조라는 단어 하나로 몇 십년간 미뤄왔죠. 대통령 직선제가 된지 벌써 30년이에요.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직선제로 하는데…. 핑계를 위한 핑계였다고 생각해요.

전 : 생각해보니 콘서트도 여러번 하고….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상당한 기획력이 있어야 하는데, 논의그룹이 따로 있나요?

이 : 물론 실무 도와주는 분도 있고, 아이디어 내는 분도 있죠. 그러나 일의 기획이나 성명성 작성 등은 제가 직접 했어요.

전 : 그런 리더십을 갖기 쉽지 않은데, 굉장한 능력인 것같네요.

이 : 어느 순간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문득 눈을 떠보면 생소하기도 해요. 글 솜씨가 있었고 학생운동하면서 기획력이 있긴 했지만,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해 나도 놀라요.(웃음)

전 : 마지막으로 치개협 활동을 시작할 때 협회장 도전을 염두에 뒀나요?

이 : 창립할 때 기자들한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당시 “내가 교두보가 되고, 개원의 세력이라는 것은 민심을 표출하는 거다. 치과계 공조직의 꿈은 협회장인데, 민의를 대변하는 단체에서 협회장 후보를 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런 후배들을 키우겠다”고 대답했어요.

실제 후배들 중에는 이경록 대변인 등 굉장히 똑똑한 친구들이 많아요. 이런 친구들을 키우려는 생각은 강했지만, 제가 직접 나올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저를 협회장으로 추대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도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 얘기했지만 성격이 원래 나서는 성격이 아니고 3년간 너무 힘들게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가족과 보내고 싶다는 요구도 강했고, 자리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었죠.

협회장은 젊은 치의들의 아픔 ‘대변자’

전 : 이제 협회장 29대 선거 국면으로 넘어가죠. 우선 출마의 변이랄까? 소신부터 밝혀주세요.

이 : 현재 치과계는 매우 중요한 변화의 시점에 서 있어요. 치과계를 이끌어갈 리더쉽이 바뀌어야 합니다. 접대선거와 동창회 줄 세우기의 구태를 반복하며 일신의 영달을 위해 합종연횡과 자리 주고받기를 해오던 지도자를 선택하기엔 치과계는 그리 한가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새 시대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개인의 영예보다는 오직 치과계를 위해 온몸을 불사를 새로운 리더가 필요해요. 또한 전체 치과인을 한 마음으로 강력히 하나로 뭉쳐낼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전 : 자신이 그러한 리더라는 말인가요? 구태에서 벗어난, 온몸을 불사를 리더까지는 공감을 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로 뭉쳐낼 수 있는 적임자라는 부분에서는 설명이 더 필요해 보이는데요.

이 : 음...누군가의 마음을 열려면, 그리고 나와 함께 하자고 설득하려면요, 우선 그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누구보다 어려운 젊은 회원들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요새 페이닥터 구인광고가 나면 50통이나 100통의 이력서가 몰린답니다. 그만큼 취업할 자리조차 없고, 어쩌다 취업해도 치과위생사보다도 못한 월급을 받고 있어요. 취업을 못한 후배들은 백수생활을 몇 달 하다가 할 수 없이 몇억을 빌려 개원해보지만, 하루에 단 한명의 환자도 못본다는 ‘퍼펙’이란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하며 이자도 못내다가 폐업을 다시 고민합니다.

제 바이스인 이태현 후보는 울산지부 회장에 두 번 도전하며, 울산의 거의 모든 회원들을 만났는데, 직원 1명 없이 혼자 치과를 지키는 원장들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답니다. 심지어 밤에 불꺼진 원장실에서 홀로 남아 깡소주를 들이키다 인생폐업을 감행하는 후배들까지 있잖아요. 이 가여운 젊은 치과의사들의 모습이 치과계의 현재이자 미래에요.

하지만, 어머니여야 할 협회는 어떠했습니까? 자식 같은 후배들을 차디차게 내몰기에 급급했어요. 이제 이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귀기울여보고, 제도권으로 따뜻하게 품어 안고 치과계를 하나로 통합해야 합니다. 저는 최소한 이런 의지만큼은 강하게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전 : 주요 정책 공약의 핵심적인 포인트만 간략히 정리해 주세요.

이 : 우선 전문의제도는 치과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해 소수정예는 고수돼야 합니다. 1차기관 표방금지도 77조3항이든, 이언주법안이든 고수돼야 하구요. 선거제도는 당연히 직선제가 돼야 하고, 동시에 동창회 선거를 부추기는 바이스제도도 철폐돼야 합니다.

불법네트워크치과 척결은 최근 룡플란트 대표가 항복을 선언했는데, 이것은 선거용이라고 생각해요. 핵심은 진료행태입니다. 여전히 불법진료 위임진료로 의료를 상품화하고 있어요. 아직 성과라고 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대정부 역량 강화는, 치과의사 출신 국회의원의 역할 제고, 공직진출 활성화, 충분한 근거자료 및 논리 확보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하고, 치과건강보험은 ‘7·15·30 희망공약’에서 밝혔으니 숙독해주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의료영리화 저지 등 대외적 태도에 있어, 그동안 치과계는 생존권과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도 60년 역사상 ‘노’라고 해본 적이 없어요. 전에는 시절도 좋았고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은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언제까지 노예처럼 살아야만 합니까?

물론 정확한 근거자료로 정부와 로비도 하고 끈질기게 협상도 해야 되죠.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위대한 힘을 결집시켜 생존권을 사수해야 합니다. 의료영리화 저지 반드시 해야 하고 정원 감축해야 하고, 동물병원 의료수가보다 못한 의료보험 수가를 근관치료부터 현실화 해야 합니다.

전 : 마지막으로 다른 두 후보에 대한 평가를 해주세요.

이 : 두 분 모두가 오랜 기간 공조직에서 경륜을 쌓으셨고 인품도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또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닌 치과계를 위해서 나선 것이란 것도 알고. 사적으로는 깎듯이 인사드리고 배우려고 해요.

전 : 바쁘신데 이렇듯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29대 협회장 선거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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