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까페 -102]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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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까페 -102]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 전민용
  • 승인 2014.08.2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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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5.18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되고 국가적 기념일로 지정되고 희생자들이 국가유공자로 존중되고 학살 책임자들이 법정에 서면서 이제 5.18의 한은 어느 정도 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아는 5.18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우리가 풀어야 숙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의 진실이든, 개인의 진실이든 아픈 과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사건 모두가 사실이라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피하고 싶은 아픔이 아니라 더 다가서고, 더 느끼고 싶은 종류의 아픔이었다. 개인이든 사회든 이런 아픔과 고통을 딛지 않고는 극복이나 발전은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소설을 읽으며 위로받고 치유 받아야 할 분들이 거꾸로 투쟁의 선봉에 서도록 밀려가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이 자꾸 겹쳐졌다. 철저한 진상 규명이라는 최소한의 요구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은 5.18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의 하나일 것이다. 5.18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분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이 세월호 유가족에게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5살, 중학교 3학년, 밤톨같이 깎은 머리의 ‘소년’ 동호의 이야기다. 동호보다 먼저 총에 맞아 죽은 친구 정대와 실종된 누이 정미의 이야기다. 동호와 함께 시신을 수습했던 수피아여고 3학년 은숙과 노동자 선주의 이야기다. 동호를 살리려 애썼고 끝까지 도청에 남았던 대학신입생 진수의 이야기다. 동호의 어머니와 장미넝쿨이 우거진 중흥동 집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이들이 특별히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우리와 우리 아이, 친구, 부모들의 친숙한 이미지가 상상할 수 없이 참혹한 이야기와 겹치면서 공포심과 공감이 함께 느껴졌다. 평생을 끔찍했던 고문의 기억과 상처 속에 죽은 사람처럼 살아온 선주가, 같은 상황이 닥쳐온다면 다시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독백하는 장면은 처연하고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작가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라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는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 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다.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다.”

▲M16자동소총을 휴대한 공수부대는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마저 뒤쫓아가서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았다. (출처 : 5.18기록관 홈페이지)

▲망월묘역 관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출처 : 5.18기록관 홈페이지)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면서도 5.18의 열흘 동안과 진압 이후의 인고의 시간들을 복원해낸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이렇게 극심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몸서리치는 잔인성을 통해 작가는 인간 보편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까지 나아간다.

5.18은 반복되고 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잔인함을 포상 받은 군인들은 광주에서 동족을 상대로 같은 짓을 반복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인간은 동일한 잔인성을 반복해왔다. 2009년 용산을 보며 작가는 “저건 광주잖아”라고 중얼거린다. 광주는 고립된 것,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정말 잘 쓴 작품이지만 단순히 ‘잘 쓴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소설 쓰는 기예를 논하기에는 내용이 갖는 무게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실에 기초한 ‘소설을 뛰어넘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5.18이 없었다면 87년 6월이 그렇게 빨리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87년 이후에 그나마 누리고 있는 성취는 상당 부분 5.18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우리 사회는 5.18과 6월항쟁의 피와 땀의 열매를 다 빨아먹고 소진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가 더 심해지는 등 상황이 자꾸 더 나빠지고 있다. 5.18이 마무리되어 일단락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작가의 눈으로 보면 세월호도 또 하나의 광주다.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5.18이 6월항쟁을 낳았고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면, 세월호 참사는 제2의 6월항쟁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억울한 죽음과 남아있는 유족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87년 6월 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다.

 

▲ 서울대교수·학생·동문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광화문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 까지 도보행진 했다. (출처 : 노컷뉴스)

전민용(건치신문 대표, 안양 비산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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