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 분단의 풍경으로 남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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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 분단의 풍경으로 남은 성
  • 임종철
  • 승인 200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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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서울에서 고구려의 유적을 찾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차성(원문은 아단성으로 기록)은 백제 책계왕(286년)때 쌓았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는 아차산성이 396년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58성 중 하나로 나타난다.

또 475년 고구려 장수 걸루가 백제 개로왕을 붙잡아 아차산성으로 압송해 죽였으며, 온달장군이 590년 이곳에서 신라군에 의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적고 있다.

아차산성은 이처럼 한강유역의 군사요충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영토싸움을 통해 서로 뺏고 뺏기는 격전을 벌인 곳이다. 하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의문이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산성 내부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백제식으로 추정하고 진행되던 복원사업도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

한편 신라의 유적으로 알려진 하남시 이성산성에서는 고구려유물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처럼 아차산성의 역사는 백제, 고구려, 신라로 이어지지만 고대문헌과 출토 유물이 빈약해 어느 것 하나 시원스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차산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것은 아차산성 주변에 홍련봉 등 여러 보루들로 보아 확실하다. 이런 혼란은 당시 밀고 밀리던 삼국의 정세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 산성 입구의 안내판 사진
세월의 무게에 불확실성이 덧붙여져 아차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많은 유적이 파괴됐고 또 발굴중이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다. 앞서 이야기한 복원된 성벽이 그나마 눈길을 끈다.

"아차산성에서 전사한 온달장군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生死)가 결정되었으니 한을 풀라 하니 관이 움직여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

지난 14일 찾아간 아차산 언저리는 워커힐 호텔에 여장을 푼 북측 방문단 맞이로 분주했다. 눈을 돌려 북방의 하늘과 능선 너머 언뜻언뜻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한강하구 분단의 현장에서 느끼는 긴장도 세월과 함께 풍광으로 남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이제 생사도 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차산이다.

지하철 7호선 용마산역에서 용마폭포 공원쪽으로 올라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는 것이 좋다.

임종철(서울 좋은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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