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수 <신드롬>,<스캔들>,<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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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수 <신드롬>,<스캔들>,<사태>
  • 박한종 논설위원
  • 승인 2005.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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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황우석 신드롬>이 <황우석 스캔달>로 변질될 듯싶더니 이제 가히 특정 방송과 국민, 그리고 최고 권력인 대통령까지 참가하는 <황우석 사태>로 그 방향을 종잡을 수도, 그 파장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병리적 모습을 그대로 노출 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선 신드롬으로서의 그것을 보자. 물론 황우석 교수의 성과는 놀라울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국민적 관심사를 지나 국가적 과제가 되는 과정 그 자체는 너무나도 비이성적인 과정이라 하겠다. 황우석 교수의 성공은 모든 국민의 모든 난치병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으로,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우리 경제의 한축이 되어 국민을 먹여 살릴 대안으로 추켜세워졌다.

그러나 냉정한 판단조차 갈 것 없이 좀 더 공정한 분별이라도 발휘해 본다면, 황우석교수의 성공은 이제 막 내딛은 발걸음일 뿐이다. 난치병 치료에 대한 현실적 부분은 너무도 제한적이고, 또한 성공의 여러 고비 고비가 버티고 있다. 거기에 황교수의 성공으로 우리가 앞서 간다 하지만, 풍부한 기초 과학적 토대와 경제력을 앞세운 여러 선진국과의 경쟁에서의 속도전도 녹녹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황교수의 성공이 국민적 열광의 예상 치에 이른다 해도 현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가 강제하는 제도적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최근 <글리벡>이나 <타미블루>에서 보듯이 지적재산권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국가적 지원에 힘입은 개발에도 그 수혜는 국민의 것이라기보다는 양극화된 한 극단에 치우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자연과학자 진영은 단군 이래 이 땅에서 자연과학과 과학자가 이렇게 좋게 대우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내심 흡족해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인정해줘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이제 <스캔들>의 문제로 가보자. 황교수의 <배아줄기세포의 성공>은 그 선구적 성격에 걸맞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명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자체가 이번 성공에 의해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윤리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번 황우석 신드롬이 스캔들로 화하는 과정이 위의 제기와 같은 판단 기준의 부재로 인해 어려운 것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보다 성찰적이며, 유의미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초기 황교수의 성과의 윤리적 측면에서의 제기가 부정적 태도 일색이었던 것은 새로운 문제 제기에 대한 고루하고 편협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켄들>의 중심은 이전에도 명백히 있었던 윤리적 기준, 특히 의료 윤리적 내용을 연구팀의 일원으로서 의료인인 노성일 원장이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제공함에 경제적 금품 수수가 있었다. 또한 노성일 원장은 제공받은 장기가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거짓 정보를 제공하거나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연구팀에 난자를 제공해준 의료인이 그 개발성과의 40%를 가지기로 했다고 한다.

연구의 숭고한 목적을 내세워 난자 취득을 위한 어쩔 수 없다는 상황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금품과 권리와 수수가 있었다고 하는 그 이면에서의 인권의 경시가 드글거린다.

그런데 이제 더욱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으니 <스캔들>이 <사태>가 된 것이다. MBC PD수첩이 황교수의 연구과정에서 벌어진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광고제공사에 불매운동을 위협해 광고를 취소시켰다. 이런 즈음에 대통령마저도 한 수 훈수를 하려다 된통 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태가 나오게 된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방송이 원죄가 없지는 않겠지만(<신드롬>을 부추긴 것이 바로 방송이 아니었던가) 사실을 밝히는 언론이 사실을 밝혔다고 특정 권력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된서리를 받게 되다니...

더 나아가 방송은 황교수의 연구 과정만이 아니라 연구 성과 자체도 문제가 있다는 내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할 지경으로 발전할런 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번 <사태>의 뿌리에는 방송의 행태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있었을 것이다. 황교수도 문제는 있지만, 이를 제기하는 방송의 진정성을 더욱 믿지 못하겠다는 것일 것이다. 사실 필자도 그런 진정성은 기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른바 <필가는 대로> 사회가 움직이는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한다. 이는 다수 국민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지도적 지위에 있는 전문가연하는 인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필가는 대로의 행동이 일련의 황교수 파동을 이끌어 오늘의 혼돈으로 규결되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제 <사태>가 <사태>자체로 남거나 또는 <해프닝>으로서가 아니라 <교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혼돈으로서의 <사태>를 보아야 할 것이다.

기실 이런 혼돈의 원인은 의식의 혼돈에 있다 할 것이다. 과학은 과학이다. 과학은 과학 고유의 논리적 방법이 있고, 그것에 충실함이 기본이다. 윤리 역시 그러하고 언론과 상식 또한 같다. 그러나 이제 과학과 윤리, 언론, 상식, 그리고 경제까지도 모두 중첩되어 있다.

과학이 윤리를 지배하려하거나, 또는 윤리가 과학을 지배하려한다면 그때 혼돈이 온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방법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혼돈 대신 독재의 투명함을 얻을 것이다.

각 분야는 홀로는 앞 설 수도, 서 있을 수도 없고(그렇게 하려한다면 왜곡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이 의지하여 가야만 하는 형국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관여의 한계를 서로가 인정하여야만 할 것이다.

더하여 이번 사태의 혼돈은 다른 한 축은 국민이란 이름의 허황됨이 있다. 물론 국민 자체와 국민이란 이름이 얼마나 다른지는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 경제>니 <국민 과학자>니 하는 이름을 앞세운 이데올로기의 반이성적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번 사태는 충분한 것 같다.

APEC의 달콤함과 그에 참가해서 이겨야 한다는 돌진적 기상이 이 허황성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국민이란 이름은 이제 실체적 진실은 물론이려니와 양극화로 치달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황폐화마저도 가려버린다.

박한종(논설위원. 서울 박한종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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