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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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리며
  • 송학선
  • 승인 2017.02.03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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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밝송학선의 한시산책 35] 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리며 / 설도薛濤(당唐770?~830)
(ⓒ송학선)

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리며 / 설도薛濤(당唐770?~830)

망望은 ‘바라다, 기다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춘망사春望詞는 봄을 기다리는 노래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동심초同心草가 바로 이 설도의 춘망사 중 3번째 시 ‘풍화일장로風花日將老 / 가기유묘묘佳期猶渺渺 / 불결동심인不結同心人 / 공결동심초空結同心草’를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이신 김억金億이 풀고 임성태가 작곡한 겁니다. 자료를 찾았더니 김억이 여러 출판물에 같은 시를 다르게 번역한 것을 모아 우리가 부르는 가곡 <동심초>의 1절과 2절의 가사로 붙였더군요.

꽃잎은 하욤업시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업네
서로서로 맘과맘 맺지 못하고
얽나니 풀잎사귀 쓸데잇는고
(중외일보, 1930. 9. 4)

꽃잎은 하욤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ㅎ다 기약이 없네.
무심ㅎ다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가피의 풀잎만 뭐라 맺는고.
(학등, 1934. 6. 6)

꽃잎은 하욤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망우초, 1934. 9. 10)

바람에 꽃이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닢만 맺으랴는고.
(동심초, 1943. 12. 31)

당시에 시작詩作이나 번역시飜譯詩의 개작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던 이 동심초를 한시 번역의 최고봉이라고들 말합니다.

여기서는 또 다른 한시의 맛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춘망사春望詞 봄을 기다립니다 / 설도薛濤
 
其一
화개부동상花開不同賞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수 없고
화락부동비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 못하네
욕문상사처欲問相思處 묻노니, 그대 어디 계신가
화개화락시花開花落時 꽃 피고 또 지는 이 시절에
 
其二
람초결동심攬草結同心 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장이유지음將以遺知音 그대에게 보내려 마음먹는데
춘수정단절春愁正斷絶 그리워 타는 마음 잦아질 즈음
춘조부애음春鳥復哀吟 봄새가 다시 와 애타게 우네
 
其三
풍화일장로風花日將老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가기유묘묘佳期猶渺渺 꽃다운 기약은 아득만 한데
불결동심인不結同心人 한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공결동심초空結同心草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其四
나감화만지那堪花滿枝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번작양상사翻作兩相思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옥저수조경玉箸垂朝鏡 거울 속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춘풍지부지春風知不知 바람아 봄바람아 너는 아느냐

설도薛濤(768?~832)는, 중국 당唐나라 때의 기녀妓女이며 여류 시인입니다. 자는 홍도洪度이구요. 장안 사람으로 아버지 설운을 따라 성도成都에 왔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음률에 밝아 나이 8세에 시를 지었다네요. 그러나 14세에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기녀가 되었답니다.
기녀로써 설도는 당시 검남서천절도사로 성도에 부임해 온 무원형, 이이간, 단문창段文昌, 이덕유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답니다. 특히 설도가 열여덟 살 때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온 위고韋皐라는 이는 그녀를 몹시 아껴, 막부幕府에서 여는 연회에 그녀를 자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 직에 임명해달라는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녀는 문인들로부터 여교서女校書라 불리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나중에 위고의 조카 위정관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을 때 설도가 그에게 보낸 구애求愛의 시가 위고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위고는 설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송주松州로 보내버렸습니다. 송주에서 설도는 십리시十離詩를 지어 위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위고는 설도를 성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막부에서도 내쫓아버렸습니다.

이후 성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부임해 온 원진元鎭과 알게 되어 4년을 보냈는데, 설도가 먼저 원진을 떠나고 원진도 다른 관직에 임명되면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금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원진을 설도가 만나러 왔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고, 원진이 떠난 뒤 설도는 사랑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며 원진 역시 기증설도寄贈薛濤라는 시로 대답했지만, 이후 원진이 새 부임지 절강에서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설도는 이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여도사의 옷을 입고 벽계방에 살면서 음시루吟詩樓를 세웠다고 하네요. 설도의 무덤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 우허우구(武侯區) 망강로望江路에 조성된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 북서쪽 대나무 숲 속에 있으며, 묘비는 그녀의 묘지명과 함께 당시 검남절도사로 있던 단문창이 서천여교서설도홍도지묘西川女校書薛濤洪度之墓라고 써 주었다고 합니다. 1994년에 다시 '당여교서설홍도묘'唐女校書薛洪度墓라고 쓴 비석이 세워졌다고 하니 혹 여행길이 있으면 찾아 볼 일입니다.
설도의 문집으로 《금강집锦江集》 5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전당시全唐詩》에 그녀의 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완화계浣花溪에 머물면서 그녀는 백거이白居易・원진元鎭・우승유牛僧孺・영호초令狐楚・장적張籍・두목杜牧・유우석劉禹錫 등의 문인과도 교류하며 명기名妓로 알려졌습니다.

장위張爲가 지은 시인주객도詩人主客圖에는 설도의 시를 청기아정清奇雅正이라 평하며 가도賈島・방간方干・항사項斯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습니다. 원元의 신문방辛文房은 설도의 시를 두고 「정情이 필묵에 가득하고 한원숭고翰苑崇高하다」고 하였으며, 청清의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주변루籌邊樓」라는 시에 시정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우국憂國의 정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설도가 송주에서 돌아와 완화계에서 살았는데, 지역 주민들이 종이 만드는 것을 보고 배워 목부용 껍질로 붉은 색 종이를 만들어 그 종이에 시를 쓰곤 했답니다. 《운부군옥》에 따르면 설도는 보통의 종이 폭이 너무 크고 넓다며 작고 가늘게 줄인 종이를 만들었으며, 훗날 사람들은 이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설전薛箋 또는 촉전蜀箋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진한 붉은색으로 색이 예쁘고 크기도 아담해 이 종이에 연애의 시를 써서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네요.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 안에는 설도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어다 썼다던 우물이 남아 있습니다. 설도薛濤 이야기는 <위키백과>에서 인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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