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반복 가능하려면 그 운명이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유전체의 구조가 변치 말아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나는 유전체의 불변고정성이 그리 믿을만한 전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유전체의 구조가 바로 운명을 뜻하는 것도 아니므로 운명의 반복가능성이라는 명제 또한 거부되어야 한다.
물론 공여자의 세포와 핵이식을 통해 생산된 줄기세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몇 생물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는 있다. 이 실험에 성공한 연구자들은 이미 두 세포의 조직적합성항원(MHC)이 일치한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똑같은 조직적합성항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세포의 운명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공여자의 세포는 이미 상당한 시간동안 유기체 내에서 특정 기능을 수행하면서 적응해 온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인해 우리는 이식된 핵은 이렇게 축적된 경험과 관계없이 인체의 새로운 발생을 유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 결과로 생산된 배아 또는 이를 자궁에 착상시켰을 때 태어날지도 모를 복제인간이 공여자와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며, 어떤 경우든 생성된 배아나 줄기세포는 세포의 공여자를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생성된 배아와 세포핵의 공여자는 처음부터 수단과 목적으로 구분되었을 뿐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타고났을 수가 없다.
생명체의 미래는 유전체의 염기서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서열 정보와 주위의 가용 자원을 활용하는 세포와 유기체에 의해 ‘개척’되어 간다.
따라서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배아의 생성을 ‘복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복제라는 말은 체세포의 공여자와 핵이식을 통해 생산된 배아가 동일한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쓸 수 있지만 실제로는 유전체의 DNA 정보를 제외하고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복제’라 부르고 그렇게 생산된 세포를 조직거부반응 없이 난치병 치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든 미래가 유전자에 들어있다는 환원적이고 기계적인 결정론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양식을 버리고 대안적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만큼 체세포핵이식 기술에 대한 기대만을 확대 재생산하는 정부와 언론, 그리고 관련 과학기술자들의 태도는 부당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