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역사를 찾다] 반석 같은 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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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역사를 찾다] 반석 같은 살곶이다리
  • 임종철
  • 승인 2006.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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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만의 광통교 다리밟기 행사가 있다는 정월 대보름 날 살곶이다리를 찾았다. 근처를 종종 지나다니면서도 막상 살곶이다리를 찾아가본지는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당시의 덤불이 우거진 개천풍경은 이제 많이 정비되어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니고 있다. 내 기억 속의 살곶이다리는 표면이 울퉁불퉁했는데 막상 다시 찾고보니 제반교(濟磐橋-살곶이다리의 원래 이름)라는 이름처럼 표면이 매끈한 느낌이 들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살곶이다리는 한자명으로 전관교(箭串橋)라 부르지만 원래 성종 때 다리 길이가 300여보가 되며 옥우(屋宇)와 같이 평평하여 행인이 마치 평지를 밟는것 같아서 왕이 제반교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송파로 건너가 충주로 나가는 통로가 됐다. 또 여기서 남쪽으로 가서 배를 타면 삼성동에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정릉(宣靖陵)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參拜)하는 길이며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있다.

세종때 왕의 행차가 빈번하여 다리를 놓는 것이 시급함을 느끼게 되었다. 세종 2년 상왕(上王)인 태종의 명으로 다리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당시의 토목 기술, 자재 공급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삼복 더위에 장마가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계절 탓도 있어서 추진이 어려웠다. 이 당시 세종은 “예로부터 백성들을 동원하는 데는 때를 맞추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장마전에 끝낼 수 있겠는가. 중단하여 가을을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갚하였다. 이에 공사는 착수한지 20여일 만에 기초 부분만 완성된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렇게 중단한 공사는 50년 이상 지나도록 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다리 공사는 왕실과 중신들의 필요성보다는 서울과 지방을 여행하는 많은 선비나 백성들이 더 시급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성종 6년(1475) 다리를 가설하도록 명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후 오랫동안 중요한 교통로로 쓰이던 이 다리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다리 석재의 절반을 가져다 쓰고 1913년 일본인들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를 발라놓는 '보수'가 이루어졌다. 일제 때 이 다리를 실측한 결과 폭이 6m, 길이가 76m였다. 1926년 을축년 대홍수때 많은 부분이 또 유실되고 1938년 옆에 성동교가 놓이면서 다리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후 살곶이 다리는 1967년 12월 15일에 사적으로 지정되고, 1972년에 크게 보수하였다. 그러나 하천의 강폭이 넓어져 동쪽은 별개의 콘크리트 교량을 연장하여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다리는 난간이 없는 단순한 구조로 장대하지만 따뜻한 질감이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다리의 안정을 위해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바깥보다 15∼40cm 가량 낮게 하여 중량을 안쪽으로 모았다. 50여년 전만 해도 어두어지면 이 다리 밑에서 노상강도가 나타났으므로 행인들이 무서워 밤을 지낸 후에야 건너 다녔다지만 지금은 정비된 중랑천 둔치와 함께 시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중랑천과 청계천 하구가 만나는 곳에 있다. 다리보다 약간 상류쪽에 중랑천 둔치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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