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시보기] 오아시스, 아직도 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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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시보기] 오아시스, 아직도 먼 ‘대한민국’
  • 이우리
  • 승인 2006.03.1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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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술자리에서 여기자를 성추행한 국회의원의 지역주민 5만여 명이 ‘사퇴반대’ 서명을 했단다. 이에 힘입은 이 국회의원은 의원직 사퇴 후 곧 있을 재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을 결심했다니, 참 지랄 같은 ‘대한민국’이다.

하긴 동료 국회의원(남자)들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사 출신이라는 자는 "급성 알콜중독으로 인한 행위"라며 자신의 전문가적 소견을 유감없이 피력한 바 있고, 또 개혁정당의 일원이라는 자는 ‘봄의 유혹’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칼럼을 통해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사회에서 '성추행'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직장동료에게 가벼운 농담 한마디를 던지거나, 힘내라며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이 사회적 분위기는 또 언제부터였을까"하고 장탄식을 내뱉었다 하니, 뭐 이런 것에 크게 할 말이 없을 듯도 하다.

어디 그 뿐인가? 맨 처음 이 사건이 알려졌을 때 “미친 놈 아냐? 어떻게 여 ‘기자’를?”하며 ‘성추행’보다는 기자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성추행한 그 국회의원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내두른 것은 역시 ‘남자’일 수밖에 없는, 바로 ‘나’의 무의식적인 첫 반응이기도 했다.

그러니 직장동료에게 가벼운 농담을 던지거나, 힘내라며 손을 내미는 상황과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심한 굴욕감과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성추행’조차 구분 못하는 한심한 국회의원 나부랭이를 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힘 있는 자=다수자'의 '힘없는 자=소수자'에 대한 일방통행적이며, 또한 무의식적인(그래서 일상화=생활화, 자기내면화 되어있는) 권력의 ‘무시무시한’ 힘의 역관계를 읽어내게 된다.

그래서 지난 2002년 제59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이창동)과 신인연기상(문소리)을 수상한 영화 ‘오아시스’를 다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960년대에 이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서 매우 독특하게 ‘고전적인’ 리얼리즘을 고집하고 있는 소설가 출신 이창동 감독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의 ‘철학적’ 깊이를 또 한층 심화시켜 준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한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의 반응은 “2002년 여성계 최악의 영화 중 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잠깐 ‘어색한’ 상황 때문에 몰입했던 영화에 대한 ‘감정이입’을 매우 심하게 방해받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잠시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책'과는 달리 영화는 숨 돌릴 틈 없는, 일방적인 상황의 끊임없는 제시에 무조건 감정을 이입해 몰두해야만 하기 때문에, 영화상영 도중 불쑥 뛰어나오는 심각한 ‘생각’은 언제나 영화감상에 방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한 모금 물과 같은 남녀 주인공의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한’ 영화라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보면서 아주 잠깐이나마 이러한 ‘생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그리고 이후 전개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상황 반전(사회의 낙오자=나쁜 사람들의 슬프면서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통해 이러한 사랑을 방해하기만 하는 한국사회 주류인들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이 영화는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버린 나는 곧바로 이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생각’을 나에게 다시 불러일으키게끔 만들어주었던 사람은 바로 나의 ‘아내’였다. 이들 주인공들의 ‘깊은’ 아픔에 공감하면서 눈물까지 찔끔 보일 뻔한 나의 “정말 뛰어난 영화”라는 감상에 “여성단체에서는 최악의 영화라 했다”는 조심스런 아내의 말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은 나는 다시 그 장면을 불현듯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하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남자 주인공이 찾아와 여자 주인공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 빡빡 머리를 밀어버린 ‘설경구’는 장애자인 ‘문소리’를 뜬금없이 ‘갑자기’ 겁탈하려 했다. 그러다 ‘문소리’의 가족들에게 들켜 뒤지게 맞으며 쫓겨나고 만다. 그런데... 그 문제의 다음 장면은 그랬던 ‘문소리’가 다음날 아침이었는지 역시 ‘뜬금없이’ 난생 처음 그렇게 해보는 듯 ‘거울’을 보며 여자의 상징인 ‘빨간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는 장면이었다.

나는 ‘문소리’의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그러한 폭력적인 행위를 한 매우 난폭한 ‘남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한 번도 그 짓을 해보지 못한 이중의 소수자 ‘장애인 여성’이기 때문이란 말인가?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급작스런 ‘생각’의 떠오름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곧바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옥의 티’에도, 그리고 여성단체들의 거센 반발에도 이 영화는 (남성)평론가들의 열화와 같은 찬탄 속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연기상을 수상하는 ‘한국 영화’의 또 한 번의 쾌거를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단체들의 ‘작은 목소리’에 남성인 진보적인 영화감독 ‘이창동’은 어떠한 변명의 목소리도 내어 놓지 않았다. 물론 그가 무어라 했음에도, 그것이 너무나도 ‘작게’ 표현돼 아직까지 내 눈에 띄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아시스가 좀 더 좋은 영화가 되려 했다면, 이창동 감독은 이 장면에서 더 많은 고민을 했어야만 한다. 이러한 폭력적인 장면이 아닌, 다른 만남을 영화 속에 배치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사랑이 어렵게 시작되는 이 ‘중요한 장면’에서 그는 자신 속에 체화되어 있는 일방적인 ‘남성적 시각’ 때문에 혹 이를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우리 사회 속의 일방적인 ‘남성적인 시각’은 나에게도, 더 나아가 성추행을 감행하고도 다시 국회의원 출마 여부를 재고 있는 국회의원의 지역구 ‘아주 요상한’ 여성단체들의 ‘사퇴 반대’ 성명서 속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바로 매우 ‘뛰어난’ 영화, 그리고 세계적인 영화로 발돋음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역사' 속에 길이 남을 영화인 ‘오아시스’를 다시 한 번 보아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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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리 2006-03-23 13:49:34
관객1분의 지적 잘 보았습니다. 영화의 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본 주제는 글에서도 일부 표현되어있듯이 '소수자'들의 순수한 사랑을 주류인들의 편견으로 파낸내 버리는 우리사회의 '기만성'이라고 보았는데요, 관객1분의 지적처럼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글은 영화의 주제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사소한 하나의 장치(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나타난 남성주의적 처리에 대한 안이함에만 주목하면서 다른 사건과 결부해 여성주의적 시각이 왜 필요한가라는 문제제기로 보아주었으면 합니다.

관객1분의 지적처럼 이 영화가 그 주제를 표현하려 했을지라도 이 첫만남을 그렇게 퍼리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였다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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