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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을 보고 '2017'을 보내며…[논설] 송필경 논설위원
송필경 | 승인 2018.01.03 16:45

1987년 4월 말, 치과 선배 한 분을 다방에서 만났다. 나는 그 선배를 진작 알았지만 선배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선배는 다짜고짜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를 반대하자고 했다. 과거에 학생 운동 전력이 있던 대구의 치과의사를 규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를 찾았다.

1980년 9월 초에 광주항쟁으로 긴 휴교 사태가 끝나고 개학을 했다. 개학을 한 지 며칠 만에 내 치과대학 동료와 후배 3명은 광주항쟁 이후 전국 최초로 ‘살인마 전두환’에 저항한 시위를 하고 감옥에 갔다. 광주항쟁 직후였으니 전두환의 서슬이 얼마나 시퍼랬던 시절이었던가.

1981년 말, 나는 졸업을 앞두고 결혼을 했다. 3년간 경북 영양과 구미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했다. 82년 10월엔 딸, 85년 1월엔 아들을 낳았다.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1985년 4월 나는 대구에서 치과 개업을 했다.

나는 결혼할 때 무일푼이었다. 경북 오지 영양에서 월세 2만 원 단칸방에서 신혼을 차렸다. 공중보건의를 하면서 월급보다 많은 부수입이 꽤 짭짤했다. 그렇게 저축한 돈과 빚 5천만 원을 내어 작은 아파트를 사고 치과를 차렸다.

1987년, 개업 2년 만에 당시로는 적지 않았던 빚을 완전 다 갚고도 얼마간 저축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돈벌이가 좋았던 개업 환경이었다.

어두운 지하 다방에서 도수 센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빛을 번쩍이며 ‘살인마 전두환’에게 저항하자는 선배의 간청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자라는 아이 둘은 내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귀여웠고, 풍족한 벌이로 아내는 만족했다. 이렇다 보니 내가 겪은 70년대 암울한 유신시대와 1980년 좌절했던 서울의 봄과 참혹했던 광주 항쟁은 아득한 기억 너머에서 가물가물 지워지고 있었다.

벼락같은 선배 요청에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어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어물어물했다. 달콤한 기득권에 절은 내 머리에는 혼돈이 찾아와 태풍이 몰아치듯 어지러웠다.

1980년 9월 초, 준공한 지 얼마 안 되는 연세대 중앙도서관 2층 대형 유리창을 최초로 박살내고 ‘살인마 전두환 살인마를 처단하라’는 현수막을 내 걸었던 동료와 후배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러자 나는 선배에게 동참하겠다고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1987년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실이 5월에 거의 드러났다. 6월에 들자 대구의 거리에도 분노의 함성이 들끓었고 7년간 사라졌던 최루탄이 난무했다. 6월 9일에 대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다쳐 사경을 헤맨다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6월 10일 드디어 역사적 ‘6·10 항쟁’이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전두환은 할 수 없이 호헌을 철폐하고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자 6월 항쟁은 민중이 승리한 듯 막을 내렸다. 이때 모인 전국 치과의사들은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의 모태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물어가는 2017년은 내가 법적 성인이 된 만 19세 이후 43년이 흐른 해다. 1987년 6월 항쟁 발발은 나에게 ‘건치’ 함께 30년 인생을 보내게 했다. 의식 있는 대부분 인생을 ‘건치’ 활동과 ‘건치’에 연관한 운동을 하며 보낸 셈이다.

지난달 30일 아내가 영화 보러 가자고 했다. 선물 받은 표로 친구들과 봤는데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 꼭 나랑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했다. 무슨 영화냐고 물었더니 『1987』이라 했다. 무척 의외였다.

나는 1987년 이후 건치 활동을 하며 가정 돈벌이에 소홀히 하여, 아내의 애를 많이 먹였다. 때문에 아내는 내 사회 활동을 적이 마땅치 않아했다. 때로는 내가 지나치게 바깥 활동을 하다 보니 사회 운동에 반발심까지 드러낼 때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1987』을 보자고 하니…

『1987』은 개봉 전부터 인터넷을 달구었다. 픽션이 아닌 다큐멘터리 성격이라고 해서 그 당시를 생생히 겪은 나로서는 내용이 새삼스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당시 상황을 너무 잘 알다 보니 영화로 30년 전 진실을 다시 마주치기에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나는 30년 지난 지금, ‘1987년’의 진실 앞에 떳떳한가?
30년 동안 사회 운동한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내 행위의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나의 삶은 ‘1987년’의 진실에서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갔는가?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나 붓다는 헤아릴 수 없는 중생(민중)을 구원의 삶으로 이끈다(멸도;滅度) 했으나, 실로 구원의 삶을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다.” 구원의 삶은 거짓에서 해방한 삶이고, 그런 삶은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했다. 당시 민중들이 생각한 구원과 해방의 도덕적 삶(진리)이 붓다가 생각한 도덕적 삶과 달랐기 때문에 붓다께서 민중에게 올바른 각성을 요구한 말씀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우주보다 넓고 깊은 뜻을 지닌 붓다 말씀 ‘멸도’를 평범한 내가 제대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 말씀을 내 나름으로 왜곡해서 빙자한 변명은 이렇다. “나 송필경은 오랫동안 사회 운동한답시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이리저리 분주했으나, 실로 내가 보여준 삶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라.”

왜 그러하냐? 나 스스로가 사회 운동에 걸맞은 엄격한 도덕적 삶이 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앎과 삶의 태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운 감각적 경험이나 불확실한 추리에 이끌렸다!
오류를 고집하여 타인과 논쟁을 오염시켰다!
수학처럼 절대적이고 확실한 도덕 원리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아침에는 훌륭한 결심을 하고 저녁에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공자께서 경고하신 말씀처럼 새로운 결의를 하고서는 돌아서 잊어버리고 어리석은 짓을 반복했다!
다시 말해 후회의 쓴 맛을 겪고서도 또 새로운 결의를 하며 새로 태어난 듯 자만했다!

그럼에도 나를 이끈 정신적인 힘은 칸트께서 말씀하신 인간 양심의 절대명령이었다.
“우리의 모든 경험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도덕 감각, 즉, 유혹에 직면했을 때 이것 또는 저것은 옳지 않다고 느끼는 불가피한 감정이다. 유혹에 굴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위선과 거짓말이 내 이익이 된다 할지라도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 의식을 일깨운 말씀이다. 다시 말해 "도덕은 본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악한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고 덕행은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대중들이 흔히 좋아하는 내용의 이야기는 우리 실제적 삶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이 세상에서는 비둘기의 순결함보다는 뱀의 지혜가 더 잘 통하고, 도둑은 많이 훔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새삼스럽게 배우고 있다.

영화 『1987』을 보면서, 1987년의 치안본부 대공처장 박처원에게 2017년의 김기춘이 오버랩되었다. 마찬가지로 공안부 최환 검사에게 윤석렬 검사가, 윤상삼 기자에게 최승호 PD와 오버랩되었다.
아! 아름다운 청년, 박종철과 이한열에게서 아무 죄 없이 스러져간 순박한 세월호 청소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은 거대한 함성의 분노에 찬 저항이었고, 2017년은 가냘픈 촛불의 거대한 저항이었다. 나는 이 30년의 역사에서 우리 민중의 역동성에 참으로 감격했다. 그럼에도 지금 현실은 30년 전보다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간극은 더 넓어졌고, 신자본주의의 양극화는 더 벌어졌다.

이런 인간의 역사에 신뢰를 보내야 하는가?

내가 꼽는 최고의 혁명 소설 『비천한 사람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지 13년인 1802년에 태어났다. 위고는 1815년에 실각한 독재자 나폴레옹을 싫어했다. 1830년에 왕정복고를 타도한 7월 혁명을 겪었고 이 미숙했던 혁명의 실패를 보고 우리에게 장발장으로 알려진 『비천한 사람들』 집필을 계획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최대 규모였던 1848년 2월 혁명을 겪으면서 혁명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이 혁명이 실패하자 프랑스 국민은 전에 죽은 나폴레옹을 호출하여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를 황제로 뽑았다. 그러자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극렬히 비난했고 결국 벨기에로 망명했다. 혁명에 관한 한 인류 최고의 명작을 망명지에서 집필한 지 30년 만인 1861년에 완성했다.

위고는 혁명의 불필요한 폭력성과 저급성까지 잘 알고 있었고 성공한 혁명을 한 번도 겪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혁명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신뢰는 참으로 깊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1987년 6·10항쟁과 2017년 촛불 혁명을 겪었다.

나는 대통령이 바뀐다고 대중 의식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내 의식이 손톱만큼도 바뀌지 않았듯이, 문재인 정부에서 보수 의식 또한 마찬가지 일거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수구의 이데올로기적 분열과 재벌의 양극화를 심화하는 행태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참한 사람들』의 줄거리는 장발장이 자신에게 간접피해를 당해 비참하게 죽은 판틴이 남겨놓은 손녀 같은 5살 난 딸 코제트를 양딸로 삼으며, 그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이야기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젊은 혁명가 마리우스라는 청년과 결혼하게 하고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눈을 조용히 감는다.

나는 장발장의 코제트에 비할 만큼 소중한 손녀를 막 얻었다. 내 손녀가 코제트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누군가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모차르트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죽음이란 더 이상 내 손녀를 볼 수 없는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내 손녀가 코제트보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는 장발장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우리가 피안(彼岸; 깨달음의 세계)의 아주 긴 삶에서는 균형을 회복하고, 아낌없이 베푼 한 잔의 물이 1백 배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정의감이 살아 날수 있겠는가?” 칸트 할배가 우리에게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1987년‘과 ‘2017년‘을 넘어선 바람직한 사회가 내 손녀에게 펼쳐질 때까지 나는 눈을 부릅뜰 것이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이여, 2017년보다 더 나은 2018년을 맞으시기를…

이 글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송필경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새날치과, 본지 논설위원)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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