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보건복지/사회 송필경의 쿠바 여행기
나의 쿠바 여행기 『왜 체 게바라인가?』12. 산티아고 데 쿠바
송필경 | 승인 2019.02.19 17:00

현지 시간 2018년 7월 7일, 새벽 2시에 일어났다. 짐정리하고 체크아웃하고 3시에 호텔을 떠나 4시에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선 공항 입구 현관에 개가 늘어지게 누워 잠자고 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개 팔자가 상팔자다. 우리 1970년대 시외버스 정류장 분위기였다.

(제공 = 송필경)

탑승권을 끊고 짐을 부치니 5시다. 모두들 잠이 모자라 대합실 의자에 불편하게 누워 잠을 잤다. 6시 반에 산티아고 데 쿠바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는 이륙했다.

(제공 = 송필경)

쿠바 섬은 악어를 닮았다고 해서 ‘푸른 악어 섬’이라고도 한다. 서쪽 아바나는 꼬리 부분에 해당하고 동쪽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래턱에 위치하고 있다. 비행거리 약 870km에 이착륙을 포함해 2시간 걸렸다.

(제공 = 송필경)

이른 아침이라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해돋이를 보았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 가까이 가자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었고,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젊은 동지들이 혁명 터전으로 삼았던 마에스트라 산맥(Sierra Maestra)이 비행기 유리창 밖으로 훤히 드러났다. 마침 창쪽 좌석을 앉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부드러운 능선에 짙은 녹음은 우리 여름 지리 산맥과 빼어 닮았다.

(제공 = 송필경)

공항은 호세 마르티 공항보다는 깨끗한 편이었다. 유서 깊은 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표현하는 사진이 대합실 벽에 길게 걸려 있다.

『Santiago de Cuba, rebelde ayer, hospitalaria hoy, heroica siempre』
단어 단순 번역으로만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산티아고 데 쿠바, 반란의 과거, 친절한 오늘, 영웅 영원한』
이 표어의 뜻을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다.

(제공 = 송필경)

‘반란과 영웅’, 실과 바늘같이 땔 수 없는 두 단어다. 위대한 반역이 영웅을 탄생하게 했다할까, 아니면 영웅이 위대한 반역을 꾀했다고 해야 할까.

인류는 역사를 이어오면서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사이에 한 번도 억압과 착취 관계를 벗어난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자는 것이 반란이었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모든 인간의 고귀한 존엄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을 우리는 ‘진정한’ 영웅-정복자 알렉산더나 칭기즈칸하고는 차원이 전혀 다른-이라 일컫는다.

반란의 땅이자 영웅의 땅에 나는 도착했다. 웬만한 여행에서는 나는 카메라 가방은 어깨에 메고 짐을 간단히 해 기내에 가지고 다닌다. 다른 사람 짐 찾을 때 나는 공항 대합실을 빠져 나와 공항 주변을 살폈다.

공항 간판은 상당히 길었다.

『AEROUERTO INTERNACIONAL 'ANTONIO MACEO GRAJALES' SANTIAGO DE CUBA』
『‘안토니오 마세오 그라할레스’ 산티아고 데 쿠바 국제공항』이다.
줄여서 ‘안토니오 마세오“라고 부르는 인물은 바로 이 땅의 반역 영웅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공항 대합실 출입로 입구에 그의 흉상과 함께 조형물이 있다.

(제공 = 송필경)

쿠바인 가이드가 우리를 맞았다. 쿠바는 관광 회사는 국영회사 하나뿐이라고 한다. 아바나에서 탔던 미니버스와 똑 같은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40대 중반 남자 가이드는 아바나에서 가이드 했던 여자의 오빠라고 했다. 남매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북한에서 살았다. 능청스런 면이 많았는데 자신의 이름을 나훈아라고 소개했다. 나훈아 노래를 아주 좋아해서 웬만한 나훈아 노래는 다 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친구는 한국에 동경이 많았다. 코트라(KOTRA; 대한무역진흥공사)의 통역 일로 서울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인천공항에서부터 한국의 으리으리함에 놀랐다고 했다. 홍대 입구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십 수군데 술집을 돌아다녔는데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매력이 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나훈아의 본명은 ‘에빌리오(Evelio Dueñas Ruiz)’이고 여기 산티아고에서부터 아바나까지 6박7일 동안 미니버스로 천 수백km 움직이며 쿠바 속살에 대해 가이드 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심심찮게 나훈아 노래를 뽑았다.

(제공 = 송필경)

산티아고 데 쿠바는 아바나에 이어 도시 인구와 규모면에서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쿠바 문화, 종교 그리고 경제의 중심지다. 1515년 건설한 이 도시는 건설 역사로 보면 아바나보다 빠르다. 16세기 전반까지 식민지 쿠바의 수도였다.

이 지역은 아이티,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아프리카를 통해 동쪽 여러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를 뒤섞어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쿠바 내에서도 카리브 해 문화 중심이었다. 이런 문화가 융합한 특징은 음악과 카니발 분야에서 잘 나타난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미국과 스페인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여기다. 이 지역은 ‘오리엔테(현 그란마 주)’ 지방의 험준한 마에스트라 산맥에 둘러싸여, 광활한 평지의 아바나 지역에서 보다 반란을 꾀하기 좋은 지형이어서 혁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시 말해 격동의 19세기에 여러 영웅이 활약한 쿠바 혁명의 발원지이자, 20세기 피델 카스트로가 청년 시절에 혁명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다.

1959년 1월 1일 새벽에 아바나를 혁명군이 장악하자, 산티아고 데 쿠바에 남아있던 33살 카스트로가 저녁에 시청 건물 발코니에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로 시작한 연설로 혁명의 성공을 선언했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쿠바 공화국의 영웅 도시’로 자리매김을 했다.

(제공 = 송필경)

공항에서 시내까지 20분이 채 안 걸렸다. 우리가 유서 깊은 도심에서 찾아간 곳은 세스페데스 공원(Parque Cespedes) 한 곳뿐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도착하기 전 쿠바 전 비행기 운항 시간이 갑자기 변경되어 산티아고 데 쿠바의 일정을 대폭 축소했기 때문이다.

세스페데스 공원 가는 길에서 거리 모습(제공 = 송필경)

쿠바 도심에 있는 모든 공원이나 광장은 아주 낭만적인 멋을 풍긴다. 그중에서도 모범이 있다면 이곳 세스페데스 공원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반란과 영웅의 도시답게 이 공원의 이름은 독립영웅인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 del Castillo, 1819∼1874) 이름에서 따왔다.

세스페데스는 이곳의 인근 오리엔테 주(현: 그란마 주) 바야모 출신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대학을 졸업 한 후, 1843년에 스페인에서 혁명 운동에 참여하다 투옥당했다. 석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설탕 농장을 구입해, 지주 노릇과 변호사로 활동했다. 1867년에는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대를 결성했다.

1868년 동지 37명과 행동했다.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를 해방하고, 147명의 반군을 조직했다. 제1차 쿠바 독립 전쟁을 시작하면서 노예 해방을 선언하면서 쿠바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다.

반란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1869년 4월에 쿠바 대통령이 되었다. 1873년 10월에 보수 세력이 다수파를 차지하는 의회와 대립하다가 실각했다. 이후 산에 잠복하고 있다가, 스페인 군에 발견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쿠바의 국부라는 의미인 ‘파드레 데 라 파트리아(Padre de la Patria)’로 추앙받고 있다.

(제공 = 송필경)

세스페데스 공원 주위는 식민지 건축물의 보고라고 한다.

공원 남쪽 세스페데스 동상 뒤로 세스페데스 공원의 한 면 거의를 차지하게 크고 은은한 흰색 건물은 눈부시게 아름답게 빼어난 아순시온 대성당(Catedral de Nuestra Senora de la Acuncion)이다. 이 성당 지하에는 쿠바 초대 총독이던(Diego Velázquez de Cuéllar; 1465~1524)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한다.

(제공 = 송필경)

공원 서쪽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집(Casa de Diego Velázquez)이 있다. 쿠바의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22년 초기 식민지에 아도비 점토로 지은 이 건물은 쿠바의 초임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관저였다. 1970년부터 역사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제공 = 송필경)

공원 북쪽에는 시의회 건물(Ayuntamiento)이 있다. 1959년 1월 1일 저녁 이 건물의 2층 발코니에서 혁명 성공을 기념하는 카스트로의 첫 연설이 있었다. (위 8번째 사진)

(제공 = 송필경)

공원 동쪽에 있는 쿨투라 미겔마타모로스의 집(Casa de la Cultura Miguel Matamoros)이 있다. 혁명 전까지 부유한 시민들의 모임 장소였다. 바로 옆에는 영국인 소설가 그레엄 그린(Graham Green)이 문학적 영감을 받고자 찾았던 그란다 호텔의 테라스 바가 있다.

(제공 = 송필경)

유서 깊은 산티아고 데 쿠바 도심인 세스페데스 광장을 훑는데 약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건물 안을 빠끔 들여다 본 곳은 아순시온 대성당밖에 없었다.

아순시온 성당에서 바라 본 세스페데스 공원과 시의회에서 아순시온 성당을 바라 본 정경(제공 = 송필경)

우리 미니버스는 언덕이 있는 좁은 길을 다니다가 교차로가 있는 확 트인 광장으로 갔다. 광장의 가장자리 중앙에 2층 높이의 낮고 편편한 언덕 가운데에 문구용 카터 칼 같은 철제 조각이 삐쭉하고, 앞발을 번쩍 치든 말에 타고 지휘하는 장군 형상의 청동상이 있다. 철제 조각은 23개라고 하는데, 보는 순간 날카로운 긴장감이 밀려왔다. 포효하는 말을 탄 사람은 안장에 앉지 않고 발걸이에 발을 걸치고 서서 뒤돌아보며 나를 따르라는 포즈 취했다. 반란의 지도자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제공 = 송필경)

이곳을 안토니오 마세오 복합 기념비(Complejo Monumental Antonio Maceo) 지역이라 한다. 포효하는 말 위에서 사자후를 외치는 장군이 산티아고 데 쿠바 공항 이름의 주인공이다.

안토니오 마세오(1845∼1896)의 본명은 ‘José Antonio de la Caridad Maceo y Grajales’다. 여기 산티아고 데 쿠바 바로 인근 오리엔테(Oriente)주 산 루이스(San Luis)에서 태어났다. 스페인계 백인 아버지(Marco Maceo)는 베네수엘라 농부이자 농산물 상인이고, 어머니( Mariana Grajales y Cuello)는 도미니카 태생의 아프리카계 쿠바인(Afro-Cuban)이었다. 혼혈인(Mulato)으로 용맹했던 마세오는 청동 티탄인(El Titan de Bronce;The Bronze Titan)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제공 = 송필경)

아버지 마세오는 젊었을 때 라틴 아메리카의 영웅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을 따라 독립군에 가담하여 스페인과 싸웠다. 1823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쿠바의 산티아고 데 쿠바로 옮겼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기 다루는 손 기술과 사업 수완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질서 규범에 대한 감각(sense of order)을 가르쳤다. 어머니의 훈육은 마세오 성격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영향을 끼쳤고, 나중에 혁명 지도자로서 자질을 키웠다.

16세 때 마세오는 노새를 이용해 수확물과 재료를 배달하면서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훌륭한 농부였다. 아버지의 사업가 수완 또한 마세오에게 장군으로서 자질에 영향을 끼쳤다. 마세오는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쿠바 프리메이슨 운동에 동참하여 프랑스 혁명의 신조인 '자유, 평등, 우애'를 가슴에 새겼다.

1868년에 세스페데스가 스페인에 대항해 일으킨 독립전쟁(십년전쟁; 1868∼1878)에 참가했다. 인종 차별 분위기 속에서도 용맹성과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마세오는 5개월 만에 지휘관에 올랐고 5년 뒤 장군으로 승진했다. 마세오는 500회 이상 전투에 참가했다.

쿠바 해방군 총사령관이 될 위대한 도미니카 전략가인 고메즈(Máximo Gómez)을 존경심을 갖고 따랐다.

이 혁명이 쇠퇴한 가장 큰 이유는 지역주의와 무질서였다. 스페인은 1878년에 평화 보장, 혁명 세력의 사면을 제안하면서 10년 동안 지속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자고 했다. 그러자 반란 세력은 거짓 사탕에 속아 세력이 점차 줄었다.

마세오는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며 스페인의 평화 협상을 거부했다. 마세오 목표의 핵심은 노예 제도 폐지였다.

‘해방군’에서 싸운 흑인 병사들의 즉각적인 사면을 요구했다. "나는 명예 훼손과 함께 간다면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

협정을 둘러싼 혁명군 내부 분열은 마세오를 고립하게 했다.

스페인 측은 마세오가 백인 쿠바인에 대하여 인종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고 흑색 선전했다.

1878년 바라과(Baragua)항쟁에서 어떤 타협도 거절하고, 스페인에 매수되는 대신 망명을 택해 코스타리카로 갔다. 호세 마르티가 "필요한 전쟁"이라고 부른 1895년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했다.

마세오는 그동안 겪은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10년 전쟁 (1868년)에서 부분적으로 패배 한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마르티와의 짧지만 격렬한 서신 교환에서 군대의 성공을 가로막는 여러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했다.

호세 마르티는 전쟁을 신중하게 준비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마세오에게 답했다. 마세오는 최고사령관을 고메즈로 하자고 요구했다. 쿠바 혁명당의 대표인 호세 마르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895년에 마세오는 쿠바 동쪽 끝인 바라코아(Baracoa) 해안 지역으로 갔다. 상륙할 때 암살 위협을 받자 이 지역의 산악으로 들어갔다. 많은 어려움 끝에 마세오는 산티아고 데 쿠바 지역의 다른 반란군들과 함께 군대를 만들었다.

고메즈가 쿠바 해방군 총사령관을 맡고 마세오는 중장으로 임명 받았다. 이들 군대는 서쪽으로 진격했다.

1896년 12월 푼타 브라바 (Punta Brava) 부근에서 전투 중에 스페인 군 총격에 죽음을 당했다.

마세오의 시신은 쿠바가 자유롭고 독립할 때까지 무덤 장소를 비밀리에 유지하겠다고 맹세한 형제가 자신의 농장에 비밀리에 묻었다. 지금 그의 무덤을 아바나의 외곽에 있는 카카우엘 기념비 (Monumento El Cacahual)가 있는 곳에 옮겼다. 이 장소는 마세오를 비롯한 여러 독립혁명가들이 묻혀 있는 데 쿠바인들의 순례길 중 하나다.

아바나에 있는 안토니오 마세오 기념관과 무덤.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옴(제공 = 송필경)

마세오는 근대 혁명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 전략가이자 군사 계획가였으며, 호세 마르티는 마세오에게 영감을 받은 쿠바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국가에 대한 나의 의무와 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보다 우선시되며, 이것들을 통해 나는 자유의 받침대에 도달하거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싸우겠다."

마세오는 근대 쿠바의 스파르타쿠스였다.

세스페데스, 마세오 그리고 호세 마르티 이 19세기 세 영웅은 20세기 세대의 독립운동가에서 영감의 빛을 발한 지도자였다. 혁명 정부의 최고 권력자 피델 카스트로는 이들이 던진 빛을 결코 흩트리지 않았다.

이 조형 언덕 앞에는 드넓은 공간을 혁명 광장(Plaza de la Revolucion)이라 한다. 광장 왼편 거리에 건물의 벽면에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 있는 밀짚모자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형상이 있는데 시엔푸에고스인 줄 알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이 건물은 근대 공연 예술을 다루는 에레디아 극장(Teatro Heredia)인데 철제로 만든 쿠바 혁명 영웅 후안 알메이다(Juan Almeida Bosque; 1927∼2009)를 기리는 형상과 ‘여기서 누구도 항복하지 않는다(aqui no se rinde nadie)’는 문구가 있다.

아바나 혁명광장에는 체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 형상이 있고, 이에 질세라 여기는 후안 알메이다 형상 내세운 듯 보였다.

(제공 = 송필경)

후안 알메이다는 쿠바의 정치인이자 1950년대 쿠바 혁명의 초기 사령관들 중 한명이었다. 혁명 후, 쿠바 공산당의 주요 간부였다. 200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쿠바 국가평의회의 부의장이었으며 쿠바 권력 서열 3위였다. 그는 쿠바공화국 영웅의 명예 타이틀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알메이다는 아바나의 가난한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에 학교를 떠나서 벽돌직공이 되었다. 1952년 아바나 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하는 동안 카스트로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 후 카스트로와 같이 혁명의 길을 걸었다.

1959년 집권하여 2016년 사망할 때까지 절대 권력자였던 카스트로는 자신의 형상을 쿠바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독립영웅 세스페데스, 안토니오 마세오 그리고 그토록 존경한 호세 마르티의 형상을 쿠바 땅 어디에나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동지이자 후배였던 후안 알메이다, 아벨 산타마리아 그리고 체 게바라의 형상 또한 전 국토에 고귀한 나무 대하 듯 정성을 다해 심었다.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혁명의 나라 쿠바, 참 부러웠다!

송필경  spk55@hanmail.net

<저작권자 © 건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송필경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상호명: (주)건치신문사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54길 21, 제1호 3층  |  대표전화 : 02)588-6946  |  팩스 : 02)588-6943
대표자: 전민용  |  청소년관리책임자: 윤은미  |  정보관리책임자 : 김철신  |  사업자등록번호 : 214-86-74634  |  발행인 : 전민용  |  편집인 : 김철신
Copyright © 2019 건치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