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역사를 찾다] 송파 삼전도 청태조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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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역사를 찾다] 송파 삼전도 청태조공덕비
  • 임종철
  • 승인 2007.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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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가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로 ‘철거’ 논란에


 

▲ 다세대주택으로 둘러싸인 삼전도비
18세기 말 영국은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사절단장에게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궤구고두의 예를 요구했고 영국왕 조지 3세의 특사로 파견된 매카트니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청나라는 영국의 통상요구를 일축했다.

 


주권국가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이었던 삼궤구고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의 항전 끝에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이 치욕을 받아들였던 곳이 송파 삼전도였고 이를 기록한 것이 삼전도비(大淸皇帝功德碑)다. 높이 395㎝, 너비 l40㎝의 이 비는 몽골문, 만주문(滿洲文), 한문(해서)의 세가지 문자로 1636년 12월 청 태종이 대병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당한 치욕의 기록이 새겨져있다. 사적 제

▲ 원래 귀부과 새 것
101호. 그런 역사를 감당하면서 주택가 한가운데 조그만 공터에 조용히 있는 이 비는 2월초 붉은 페인트로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오랜만에 뉴스에 올랐다.

 

삼전도비의 수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청에 대한 치욕의 상징인 이 비는 청일전쟁 무렵인 1895년 고종황제가 비석을 한강에 내던져 버렸으나 일제가 1913년에 건져내 다시 세웠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땅에 묻혔다가 1963년 홍수로 발견돼 다시 세워졌고 이후 송파대로 확장공사로 다시 옮겨져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 청태종에 항복하는 인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등에 맞선 국수적 민족주의가 문화재 훼손의 원인일 것 같지만 막상 이 비석의 철거(물론 파괴는 아니고)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수년전부터 있었다. 송파구의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주민들은 이 비석 때문에 주변이 사적으로 되는 바람에 지역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원래 이 비석이 지금의 석촌호수 근처에 있었다는 고증을 내세우며 이전을 요구했다고 한다. ‘철거’라는 붉은 글씨는 새삼 이런 의심을 짙게 한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인지 주변은 그리 깨끗이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다.

 


▲ 삼전도비가 있는 공터, 전체 모습
사건의 원인이 뭔지 어떻게 되는게 바람직한 결론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개발논리라는 이 시대의 침략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나같은 보통 서울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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