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재발견
우리 집은 다소 엄격한 집안이다. 아버지께서 엄하셔서 학생이 공부 이외에 다른 걸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는 TV 드라마였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같으신 분이셨다.
항상 하시는 말씀은 공부외에 하고 싶은 것은 대학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고등학교 때는 오로지 학교 공부에만 충실하라고 말씀하셨다. 잘하는 공부도 아니었지만, 자식들 대학공부까지는 당신께서 책임지겠다고 하시면서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만 갈 수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학교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필기도 잘하고 노트정리도 잘하는 편이었다. 근데, 수업만 끝나면 집중이 되질 않아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막 사춘기, 성장통을 앓고 있는 시기여서 참고서만 들여다보면 같은 줄만 계속 읽다가 푹 쓰러져 자거나 도서관에서 뛰쳐나가 얘들하고 공을 차거나 농구를 했었다.
성적이 좋을리 없었다. 그나마 억지라도 도서관에 앉아있던 덕에 성적이 향상되지는 않았지만, 떨어지지도 않았다. 왜 공부하는지, 대학에서 뭘 전공할 것인지, 뭐하고 살 것인지, 때늦은 사춘기 고1에게는 정체성의 혼란이 매우 심각했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얘들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보다는 운동이 좋았고, 교실 보다는 운동장이 더 좋았다. 딱딱한 골프공 보다는 통통 튀는 축구공, 농구공이 훨씬 좋았다.
체육시간에 체육샘이 축구공이나 농구공 하나 던져주고 놀아라, 하면 강아지들 뛰 듯 좋아하며 공 굴러가는 쪽으로 신나게 우르르 몰려갔었다. 딱딱한 클래식 음악 감상 시간에는 몰래 팝송 한 곡 듣는 것이 더 좋았다. 당시 팝송은 왜 그렇게 좋았던지,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부르기도 했다.
한번은 학생 야유회에서 학내 공식, 비공식 록 그룹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보칼의 노래는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 같았지만, 화려한 기타 애드립은 환상이었다. 한마디로 뿅 가고 말았던 것이다. 테이프로만 들었던 전자기타 소리가 실제로 들어보니 정말 죽여줬다.
나도 기타를 배워야겠다. 저걸 못치고는 삶이 상당히 쪽팔릴 것 같았다. 기타를 배우려면 우선 전자기타나 통기타 정도는 집에 하나 있어야 한다. 기타를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좌절해야만 했다.
집에다 전자기타는 커녕 통기타라도 들여놓는 순간, 한바탕 뒤집어 질 것이다. 아버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리 만무하다. 잘못하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런 암울한 생각이 들면서도 기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점점 더 굳어갔다. 학교 서클 룸에 가보면 항상 한 두 명이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쳐다보며 어떻게 치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물론 기타를 잡아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 냈다.
아~! 기타 한대만 있었으면... 소리가 나지 않더라도 왼손으로 코드 연습이라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시에 나는 오른손에는 거의 항상 피크가 들려 있었다. 오른손에 피크를 들고 허벅지 쪽 교복옷감을 기타삼아 연습이랍시고 업다운 피킹 스트로크를 연습했었다.
어디, 부서진 기타 중에 운지를 할 수 있는 기타플랫이라도 구할 수 없을까. 별 생각을 다했다. 그때 번쩍 생각나는게 있었다. 그래, 기타 플랫을 만들어 보자! 진짜 기타를 상상하고 두꺼운 골판지나 마분지로 개방현 쪽 1플랫에서 5~6플랫까지만 만들어도 코드연습을 할 수 있다.
그때 책상 앞에는 [수학의 정석]책이 침이 묻은 채 펼쳐져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난 그날 밤에 집에 들어오자 말자 [수학의 정석] 뒤 카바를 과감히 잘라냈다. 그리고 만들었다. 기타 플랫을... 정석 책 카바가 하드카바라 기타 플랫 형태로 자른 다음, 위에 하얀 종이를 붙이고 기타 1번 줄 부터 6번 줄 까지 그리기 시작했다. 소리 안 나는 멋진 기타 연습도구가 탄생한 것이다.
아마도 그 [수학의 정석] 뒤 하드카바로 만든 기타플랫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사용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오고, 대학생이 되자마자 통기타를 샀다. 한 번도 제대로 쳐본 적이 없는 통기타를 산 날 저녁에 나는 가족들 앞에서 [젊은 연인들]이라는 대학가요제 수상 곡을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족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기타 처음 만지는 놈이 노래책에 나와 있는 쉬운 노래는 얼추 반주를 해대니 말이다. 당시, 학력고사에서 수학 성적은 별로 안 좋았지만, [수학의 정석]을 통해 아마추어지만, 음악계에 데뷔한 셈이다.
지금도 내방 한쪽엔 스트라토캐스터 전자기타와 작은 앰프, 오버드라이브, 디스토션 등이 널 부러져 있다. 밤마다 앰프를 작게 틀고 TV이나 라디오, CD에서 나오는 어떤 곡이라도 조성에 맞게 즉흥 애드립 연주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위층에서 시끄럽다고 가끔 내려오기도 하지만.
나에게 [수학의 정석]이란 이런 것이었다. [수학의 정석], 일독은 아니더라도 일용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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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정석'을 통해 공부의 즐거움?을 알았다..
뭐 이런 전개를 예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