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배반하는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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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을 배반하는 능력주의
  • 안은선 기자
  • 승인 2023.06.2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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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건치, 지난 27일 온라인 월례포럼 개최…장석준 부소장 초청 강연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서울경기지부는 지난 27일 정의정책연구소 장석준 부소장 초청 월례포럼을 진행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서울‧경기지부(회장 구준회 이하 서경건치) 월례포럼이 지난 27일 오후 7시 30분부터 온라인으로 개최됐다. 월례포럼에는 서경건치 회원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월례포럼은 정의정책연구소 장석준 부소장이 자신의 저서인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지도’를 중심으로 능력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짚고 우리나라에서 이 능력주의가 어떻게 발현됐고 어떤 부작용을 내는 지 등을 풀어냈다.

먼저 장 부소장은 ‘능력주의’로 번역된 Meritocracy(메리토크라시)의 본래 뜻을 해석했다. 메리토크라시는 1958년 영국 노동당 정책가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이 귀족주의 사회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만든 말로, 장점, 미덕, 업적, 성적이란 뜻을 가진 메리트(merit)에 정치, 지배라는 뜻의 라틴어 cracy를 붙여 만든 신조어다.

마이클 영이 활동하던 1950년대 영국은 노동당이 집권하던 시기로, 이들은 ‘평등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도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개혁을 실시해 ‘종합학교’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마이클 영은 교육제도가 개혁됐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계급이 부활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담아 메리토크라시라는 개념을 만들고 소설을 썼다.

장 부소장은 “마이클 영은 메리토크라시를 지능+노력으로 정의했는데, 이를 한국식으로 말하면 ‘노오력’이다”라며 “사람의 수많은 능력 중에서 오직 ‘지능’만을 유일한 평가와 보상의 기준으로 삼으며 이러한 능력 차에 따른 서열화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게 메리토크라시, 능력주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마이클 영은 종합학교라는 평등한 교육제도 내에서 지능이 높은, 혹은 부모의 금전적 영향력에 의해 지능이 높게 평가되는 아이들은 졸업 후 더 높은 계급과 지위에 오르는 그런 사회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며 “순수한 능력이 아니라 실은 ‘노오력’이라는 이름의 부모세대의 사교육에 대한 투자, 부와 권력이 개입될 여지가 큰 교육‧사회 질서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메리토크라시는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독일과 미국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장 부소장은 “19세기 말 독일과 미국이 중심이 된 2차 산업혁명은 거대규모의 공장과 기계 배치가 필수로 산업과 자본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절대적이었다”며 “우리가 박정희 시대 때 경험한 것처럼 이때 출발한 기업들은 전부 대기업으로, 국가와 비슷한 규모다. 거대한 규모의 생산설비와 인력을 운영하기 위해 전에 없던 존재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있는 국가 관료와 유사한 고졸 이상의 중간지식층인 관리직/경영직이 등장했다”고 밝혔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업은 중간 관리층에 ‘대졸’이상의 지식수준을 요구하게 됐고, 20세기 초까지 귀족, 자본가 자녀 중심의 교육을 했던 대학이 ‘대중대학’으로 개편되고, 대학생 숫자가 늘어남과 동시에 대학 간의 서열이 생겼다”며 “아이비리그-주립대-사립대-칼리지-전문대 등 미국 대학의 서열구조는 이 때 생겨난 것이고, 이 구조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더욱 극악한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다.

교육제도를 통해 시험을 보고 남보다 높은 지능을 인정받아 자리에 오른 이들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바람과 함께 신종계급으로서 그 지위와 ‘메리토크라시’적인 세계관을 공고히 했다.

장 부소장은 “지구화, 금융화, 정보화로 인해 이 지식중간계급은 더 중요해졌으며, 이들 중 아정된 일자리와 부를 축적한 이들은 부동산, 주식으로 부를 더욱 확대하고 교육제도로 이를 세습했다”며 “이렇게 사회‧역사적 성공을 거둔 지식중간계급, 메리토크라시는 노동자 계급 자녀들에게 부모세대, 조상들 보다 더 못 살 것이고 이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깊은 열패감을 심어주는 한편, 메리토크라시적 지배질서에 더욱 순응하고 복종하게 됐다”고 말했다.

메리토크라시 ‘정점’에 선 한국

장석준 부소장은 한국은 메리토크라시 문제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봤는데,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베트남은 ‘과거제도’라는 시험으로 관료를 뽑는 관료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미 메리토크라시적 질서가 익숙하다는 것.

거기에 1960년대 박정희 정부 때부터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동시에 전쟁과 분단으로 노동계급의 운동 전통이 단절된 상태로 자본주의가 성장했다. 

장 부소장은 “유럽과 미국 등의 경우 노동자 계급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중간지식계급이 성장한 반면, 한국의 노동자 계급은 역사적 패배를 안고 지식층과 동시에 성장하며 메리토크라시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게 사회 깊숙이 스며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 지식중간계급은 1980년대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했다”며 “아파트 중심의 부동산 투자, 대학서열에 맞춘 입시경쟁, 메리토크라시 기준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고 지위와 직업을 세습하며 그 세계관을 사회전체로 확장시켰다”고 짚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후발주자임에도 가장 메리토크라시의 극단과 정점을 찍었다. 대표적 사건이 이른바 ‘인국공 사태’와 ‘조국 사태’다. 

인국공 사태는 2020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보안검색요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젊은 정규직들이 반대한 사건이다. 메리토크라시적 질서를 체화한 정규직들과 취업준비생들은 ‘시험’이라는 공정한 절차를 통해 선발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정규직화는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조국 사태’ 역시도 메리토크라시를 통한 부와 계급의 세습 문제라는 성공한 중간지식계급의 민낯과 불법이 드러난 사건이다. 장 부소장은 “이 문제를 메리토크라시 안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해법이 될 수 없어 메리토크라시적 질서를 강화시키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며 “이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어떤 계급적 입장과 시야에 따라서 문제를 악화시키는 건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대학서열구조를 해체하는 교육개혁이 필요하다”며 “메리토크라시를 신앙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로만 보지 말고 계급문제로 보면 자신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사회를 다르게 보는 집단이 등장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고 밝혔다.

장석준 부소장
장석준 부소장

진짜 다양한 ‘능력’이 존중받는 사회로…

장석준 부소장은 메리토크라시가 가져온 부작용을 해소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대안으로 다소 추상적이지만 ‘주눅들지 않는 주체’와 ‘21세기형 복지국가’를 들었다.

그는 “메리토크라시가 인간의 수많은 능력 중 ‘지능’만을 중시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능력주의는 다양한 능력이 해방되는 능력의 다원론이다”라며 “능력의 다원론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메리토크라시적 평가 기준에 ‘주눅들지 않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제시했다.

장 부소장은 이러한 ‘주눅들지 않는 주체’들이 각자의 능력 별로 조직을 만들고, 그에 맞는 다양한 생산과 서비스 활동을 하며 민주적으로 사회를 공동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최소한의 삶과 존엄을 보장하는 ‘21세기형 복지국가’, 사회 안전망의 구축이다.

그는 “지능과 자본 본위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돌봄, 친절, 상상력, 장미를 가꾸는 능력 그리고 이 모든 능력에서 자유로운 모든 것이 철저하게 존중받는 사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며 “주눅들지 않는 주체를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들이 민주적으로 권력을 분점하고 국가와 자본이라는 조직과 대등하게 협상할 때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결론 지었다.

계급없는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소유하는 동시에 그런 가치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회가 되리라. 우리가 사람들을 지능과 교육, 직업과 권력만이 아니라 친절함과 용기, 상상력과 감수성, 공감과 아량에 따라서도 평가한다면,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아버지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경비원보다 과학자가 우월하며 장미 재배하는 데 비상한 솜씨를 지닌 트럭 운전사보다 상 받는 일에 비상한 기술이 있는 공무원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출세할 기회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이끌기 위해 자기만의 특별한 역량을 발전시킬 기회를 균등하게 누리게 되리라.

- 마이클 영 『meritocracy』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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