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결성과 근로기준법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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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결성과 근로기준법의 발견
  • 송필경
  • 승인 2023.07.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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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깊이 알기⑥: 전태일의 좌절과 분노

1. 철학자 전태일

전태일은 초등시절에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여섯 식구가 천막촌에서 살며 단칸 셋방조차 그나마 사치였다. 때문에 초등학교는 겨우 2년을 다녔고 대구 남산동 셋방시절 근처 명덕초등학교 부설 야간 청옥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 1년을 다녔을 뿐이다.

학력이라 할만한 건덕지가 없지만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하층 노동자로 입에 겨우 풀칠하면서도 배움을 향한 열의가 남달랐으며 지혜를 구하고 세상의 참뜻(진리)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서양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ia) 사람을 철학자(philosopher)라 한다. 철학은 인간과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소박하게 정의할 수 있다.

전태일이 남긴 수기, 일기, 유서에서 보이는 현실을 고뇌하는 생각을 담은 글의 품격을 보면 전태일을 훌륭한 사상을 지닌 철학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보면 ‘전태일 사상’이 책의 내용 5부 가운데 1부를 차지하고 있다.

1969년 11월에 쓴 유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끝마친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 중략 …
그럼 이만 작별을 고하네. 안녕하게.
아, 너는 나의 나다. 친구여 만족하네, 안녕.

서양철학에서는 사랑을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 필리아적 사랑으로 나눈다. 아가페는 신의 절대적 사랑을 말하고 에로스는 육체적 사랑을 말한다. 필리아(philia)는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을 말한다.

전태일이 친구에게 ‘너는 나의 나다’라고 말한 뜻은 친구를 최선의 사랑으로 대하는 마음의 철학적인 표현이다. 나는 이 필리아적인 표현에서 전태일의 절절한 이웃사랑과 나아가 웅혼한 형제애(박애)를 느꼈다.

서양의 철학에 해당하는 인도말은 ‘다르샤나(darsana)’라 한다. 본다는 뜻으로 견해, 관점, 통찰을 말한다. 서양철학이 진리를 그리워하고 끊임없이 갈구하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인도철학은 직접 보는 것이며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의 진리, 혹은 실재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다르샤나다.

- 이지수의 『인도에 대하여』에서 인용

전태일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보고 겪었다. 어린 여성노동자가 왜 그리 비참한 지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노동현실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비판하면서 개선방안을 짜냈다.

개선방안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더 나아가 노동자를 위한 모범업체를 구체적으로 구상했다. 박정희가 시동을 건 남한식 자본주의 노동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직관으로 통찰한 전태일의 지혜는 유구한 인도 사유의 ‘다르샤나’와 다를 바 없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2. 묵자의 교리(交利)

묵자는 하늘이 우리에게 차별없는 사랑을 베풀듯이 우리도 남에게 차별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혼란한 사회를 안정할 수 있다고 했다. 묵자 사상의 핵심은 사람을 대할 때 차별하지 말고 모두를 함께 아울러서 아끼고 챙기는 '겸애(兼愛)'와 이러한 사랑이 실제로 서로에게 이익(교리)이 되게끔 하는 데 있었다.

묵자는 교리의 예를 이렇게 들었다.

“저잣거리에 앉은뱅이와 맹인이 있다. 앉은뱅이는 움직이기 힘들어 동냥이 어렵고 맹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몰라 동냥이 힘들다. 앉은뱅이가 맹인을 보고 자신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앞을 볼 수 있고 그대는 앞을 볼 수 없으나 걸어 다닐 수 있으니 힘을 합치자고 말이다. 그리하여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함께 동냥을 하고 다녔다.”

묵자는 고대 사상가 가운데 노동의 중요성과 분업을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이다. 묵가의 겸애는 '내가 남을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하고 더 나은 세상이 된다'는 주장으로 서로 이익과 편의를 주고받는 실용을 강조했다. 이를 이타적 이기주의로 보기도 한다.

겸애를 현실에서 이루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겸애하면서 교리하자는 묵자의 주장이 실제적으로는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묵자의 메시지는 공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유토피아의 꿈을 키웠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에서 인용

그래서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 하는 ‘묵자’』의 저자 기세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 최초의 진보주의 사상가이며 노동자의 시조다. 묵자를 모르고 감히 진보를 말할 수 있겠는가?”

2,500년 전 노동자 사상가 묵자가 설명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노동자공동체가 현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노동조합이 아닐까?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3. 근로기준법의 발견

1969년 겨울 어느 날 전태일의 일기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전태일의 아버지 전상수는 1924년 경북 선산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해방 당시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일을 했다. 1946년 가을, 아버지는 대구에서 큰 일을 두 번 겪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9월 총파업’과 미군정 폭정에 항의하는 ‘대구 10월 항쟁’이다.

아버지는 두 사건에 젊은 노동자의 평범한 혈기로 단순 가담했다. 열악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두 사건에서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듯 업주(자본)와 경찰(권력)이 한 통속이기 때문이었다. 파업이 깨지고 난 뒤부터 아버지는 ‘노동운동’과 담을 쌓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노동운동하려는 낌새를 알았을 때 노동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자신의 경험담으로 아들에게 강하게 설득했다. 그럴수록 아들은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이니 내가 꼭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태일의 의지가 당차더라도 뚫어야 할 현실 자본주의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아버지에게 노동운동도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큰 실망에 부딪혔지만 아버지와 이야기 도중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내용을 알았을 때 새로운 열의가 불타올랐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의 핵심이 ‘근로자의 생활보장과 향상’이라는 걸 알았다. ‘희망의 가지가 잘린 어린 여성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은 캄캄한 밤길을 밝혀줄 한 줄기 횃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청계천 봉제노동자는 1달에 일요일 2번만 휴무다. 일요일 없이 하루 14시간 노동하면 일주일에 98시간이다. 근로기준법에는 일주일에 48시간, 단 업주와 합의를 하더라도 60시간을 넘으면 안 된다고 했다. 여성노동자에게 월 1회 유급 생리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밑바닥 노동자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에게 법으로 보장한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 노동자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목적으로 삼은 전태일은 비로소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4. 노동조합을 위한 바보회 조직과 좌절: 정의 없는 현실을 향한 분노

노동자이자 사상가인 묵자가 추구한 궁극은 연민의 감정을 넘어선 정의였다. 비참한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고 여기는 연민이 샘솟는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나서서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면 진정한 연민이 아니라고 묵자는 말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미싱기술을 익힌 전태일은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아 재단사로 빨리 승진했다. 봉제업체에서 재단사란 업주를 대리해 시다들을 관리·감독하는 감시자 역할도 하는 최상급 노동자였다. 감시자는 노동자보다 업주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해야 했다.

재단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여성노동자가 머뭇거리며 전태일에게 하소연했다.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나 봐요.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제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 않고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 않아요.”

하루 14시간 이상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일에 치여 아프다고 호소하면 해고당했다.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아픔을 잊는 진통제나 졸음을 잊는 각성제 주사를 맞아가며 일해야 했다. 대신 젊은 몸을 망가뜨려야 한다.

상급자 전태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돈으로 치료를 해주던지, ‘참고 일하라’고 말을 하던지, 업주를 대신해서 해고하는 길밖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성 미싱사가 작업을 하다가 새빨간 피를 토했다. 평화시장 직업병인 폐병이 3기였다. 그 여성은 치료비도 못 받고 해고당했다. 푼돈에 단 하나뿐인 몸을 망친 뒤였다.

젊은 노동자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법으로 분명하게 보장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쥐여 짜이는 고통에 신음하자 법을 무시하는 현실에 분노가 치솟았다. 전태일은 먼저 냉철한 반성을 하고 나서 분노했다. 동시에 현실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비판했다. 물론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전태일은 노동자로써 현실에 맹목적으로 굴종한 결과, 인간대접이 아니라 기계취급을 받고 있는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를 ‘바보’라 생각했다. 이 점이 노동자 전태일의 위대한 자각이었다.

바보란 약은 사람이 아니다. 약은 사람이란 주로 똑똑한 사람, 배운 사람이다. 출세나 재산을 모으기 위해 현실에 잘 적응하고 현실을 이용하면서 웬만하면 현실에 타협하고 심지어 권력과 돈에 무릎꿇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법이란 원칙은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에 불과하다. 돈과 권력으로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소수자들이 조직하지 못한 다수 민중의 권리를 빼앗는 게 지금 이 순간까지의 역사 현실이었다.

전태일은 초등학교 수준의 학력으로 법학을 전공한 대학생들이 읽는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어머니를 졸라 샀다. 어린 여성노동자의 1달 급료에 해당하는, 가정형편상 책값으로는 아주 많은 돈이었다.

한자 전문법률용어 투성이의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무지렁이 노동자 전태일이 이해하기란 마치 등산장비 없이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는 꼴이었다. 아무리 우수한 대학생이더라도 철학적 훈련없이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란 책을 맛보기조차 어려울진대, 그보다 더 어려운 배움의 산에 전태일은 올라갔다.

전태일은 어려운 한자가 나오면 동네 나이 많은 대학생 아저씨를 찾아가 물었다. 용어와 뜻을 모르면 밤늦게라도 찾아가 귀찮게 굴며 집요하게 배웠다.

전태일은 ‘바보회’를 조직하고 나서 평화시장 동료 노동자들에게 나름대로 배운,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을 해설해줬다. 전태일의 ‘바보회’ 조직은 노예처럼 억압받는 노동자의 의식을 일깨우는 기상나팔소리였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노동자 약 3만 명이 있었는데 전태일 혼자 부는 기상나팔소리는 그들 모두를 깨우기에 너무나 미약했다. 현실의 벽이 너무 두껍거나 높아 넘어가기 불가능하면 사람은 암담한 절망에 빠진다. 이때 엉뚱한 생각, 즉 공상을 한다.

‘바보회’ 조직을 통한 노동조합 설립은 당시 노동자 의식이 소극적이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좌절하지 않고 사방팔방 근로기준법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호소했으나 냉냉하게 내쫓겼다. 노동청을 찾았다. 야멸차게 내쫓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썼다.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해 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는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이 편지는 보내지 않았던지 전달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전태일의 요구는 당시 사정에서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요구나 청원이 거절되자 전태일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썼다.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하지만 분노와 절망이 깊을수록 전태일의 마음 속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인 어린 여성노동자를 향한 연민이 끓어올랐다.

1969년 9월 친구 원섭이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현실에 분노로 울부짖고 있다.

“부잣집 자녀 같으면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한창 재롱이나 떨 나이에, 생존경쟁이란 없어도 될 악마는 이 어린 동심에게 너무나 가혹한 매질을 하고 있네.”

전태일은 사회변화를 가슴 뜨거운 풀빵정신(연민)으로만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태일의 정신은 그런 것이다.

노동자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구별없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생각을 바탕에 깔아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란 차별없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노동운동은 근거해야 한다.

비정규직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거기서부터 우리가 함께사는 사회, 전체가 아름다운 세계가 되지 않을까? 노동운동은 그래야만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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