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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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
  • 송필경
  • 승인 2023.08.1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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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학교에 다니면서 글쓰기의 기본인 일기나 독후감조차 쓴 적이 없었다. 1990년대 중반 내 나이 40살 즈음에 내 생각을 글로 나타내보자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 당시는 세계적으로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국내에선 양김의 분열로 군부체제가 이어지면서 어안이 벙벙했던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YS가 군부독재의 잔재들과 3당합당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뒤집고 신념을 팽개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토록 존경했던 김지하가 그랬고, 김문수도 그랬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 내가 생각해왔던 가치와 지켜내야 할 신념이 무엇일까를 글로 정리하기 위해 이오덕, 권정생 선생의 책으로 글쓰기 독학을 시작했다.

어느덧 30여 년 동안 글을 끄쩍거려왔지만 글쓰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만 뼈저리게 실감했다.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려면 글이 간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참신하지 않으면 낡은 글들만 이리저리 덧대기 마련이었다.

글이 쉽고 간결할수록 더 설득력이 있다는 점은 만고의 진리이다. 쇼펜하우어는 ‘문체는 정신의 표정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문체로 정신의 표정을 짓는 일은 타고난 재능에다가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돼야만 가능할 것이다.

우연히 읽은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의 문체에 감탄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후 그의 글에서 간결한 문체에 아름다움을 느끼곤 했지만 글의 주제의식과 가치가 나하고는 얼마간 결이 달라 깊이 읽지는 않곤 했다. 아름답고 훌륭한 글에서 그의 의식에 잠재해 있는 듯한 파시즘적 성향을 불쑥불쑥 드러낼 때는 당혹하기도 했다.

2018년 쿠바여행을 통해 그들의 혁명을 엿보았던 적이 있다. 쿠바인들은 미국인 소설가 헤밍웨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미국의 코앞에서, 미국에 반란을 꾀했던 나라의 사람들이 어떻게 미국인인 헤밍웨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지.” 쿠바를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으뜸가는 명대사이다. 이 소설은 헤밍웨이의 작가정신이 간결한 문체로 세계문학사에 이름을 새긴 명작이다.

헤밍웨이의 작가로써 뛰어난 미덕은 자신이 글로 쓴 가치와 신념을 실천한 데 있었다. 1936년 스페인내전은 베트남전쟁과 함께 20세기 인류의 양심을 실험한 전쟁으로 꼽힌다.

스페인내전이 터지자 나치독일의 위협을 느낀 여러 국가의 문인 혹은 신문기자들이 의용군으로 스페인에 몰려왔다. 파시즘과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뒤섞인 이념의 각축장이었던 스페인내전에서 헤밍웨이는 이념보다 양심의 판단에 따라 참전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도 참전했다.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그 경험으로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다. 중일전쟁에 기자 역할로 참가해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취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당연히 참전했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싫어합니다. 전쟁을 기어코 일으키는 정치가들의 나쁜 처신과 이기심과 야심을 혐오합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전쟁에서 지면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훈과 헤밍웨이, 연암 박지원.(사진제공= 송필경)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훈과 헤밍웨이, 연암 박지원.(사진제공= 송필경)

헤밍웨이는 스페인내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카스트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게릴라전을 배웠다면서 헤밍웨이를 존경했다.

"한 사람의 농부라도 제대로만 역할을 한다면 군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헤밍웨이는 설명했습니다. 나는 늘 적진 깊숙한 곳에서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기억했습니다. 나를 일깨워 준 이 책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헤밍웨이는 1937년 열린 미국작가회의 연설에서 파시즘의 폭력주의를 부정했다.

“훌륭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없는 정부형태가 딱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파시즘입니다. 파시즘은 골목대장들이 하는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작가는 파시즘 아래서 살거나 창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스페인의 투우를 무척 즐겼던 헤밍웨이는 파시스트가 승리하자 더 이상 스페인에 갈 수 없었다. 고향처럼 머물던 플로리다 주 키웨스트가 관광지로 북적이자 불과 150km 떨어진 스페인풍의 도시, 쿠바의 아바나에 눌러앉다시피 했다.

당시 쿠바는 미국 마피아들의 안마당 놀이터였다. 마피아의 앞잡이 독재자 바티스타의 부패와 잔학상에 환멸을 느낀 헤밍웨이는 젊은 반항아 카스트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지지했다.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을 성공하자 헤밍웨이는 뉴욕타임스 기자 매튜스에게 편지를 썼다. “ 카스트로가 타협하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없을 것이네.” 헤밍웨이는 친구인 매튜스와 함께 쿠바혁명에는 무언가 소중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정세격변이 있는 곳을 찾아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빈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과도한 소요는 점차 가라앉을 것이고 쿠바의 새로운 혁명체제가 지배계급들에게 수세기 동안 무시당해온 일반 노동자들을 보살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반미주의자 카스트로는 이런 헤밍웨이를 예외적인 미국인으로 보았다. 카스트로는 이 유명한 작가야말로 “비록 양키(미국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지만 이 섬(쿠바)에서 언제나 환영받을 것”이라고 옹호했다.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낚시를 즐겼던 1936년부터 『노인과 바다』를 구상했다. 16년이 지난 1952년 ‘라이프’지에 『노인과 바다』를 선보였다. 출간 이틀 만에 500만 부가 팔렸다. 1953년 퓰리처상을,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가혹한 현실에 굳게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했다. 잔인한 현실을 성숙하고 균형잡힌 통찰력과 불굴의 인간성으로 조명하면서 동전의 양면인 인간의 나약함과 고독을 실존주의 기법으로 날카롭게 묘사했다.

헤밍웨이는 작가가 지녀야 할 기본 자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의식이 없는 작가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영재학교 졸업앨범이나 편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좋은 작가의 가장 핵심적인 재능은 충격방지 처리가 된 헛소리 감지기를 내장하는 것이다. 그게 작가의 레이더이고 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걸 가지고 있다.”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헤밍웨이의 불필요한 수식어가 없는 ‘하드 보일드(hard-boiled)’란 메마른 문체에 관심이 있었다. 간결한 서술은 헤밍웨이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복잡한 이야기라도 요지는 간단했다. 문학적 수사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장황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젊을 때 기자생활을 한 헤밍웨이는 신문 기사를 쓰면서 상황이나 해석이 거의 없는, 사건 자체에만 집중했다. 소설가로서의 글쓰기 역시 장황하게 주제를 논하지 않고 서술을 최소한으로 해 주어와 동사, 그리고 최소한의 형용사만으로 분명하고도 쉬운 글을 썼다.

소설의 주인공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독자들에게 말하기보다 주인공들의 대화와 행동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독자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진실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랐다.

2018년 쿠바여행에서 사생활이 문란하고 성격은 괴팍했지만, 현실참여에 열정이 남달랐던 헤밍웨이를 다시금 생각했다. 아울러 나는 헤밍웨이의 이런 낙관을 좋아한다.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헤밍웨이의 글쓰기를 보면서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의 글쓰기가 떠올랐다. 글쓰기를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의 도구나, 마음을 고상하게 하거나 위로하는 도구가 아닌, 사회비판을 위한 활동으로 생각한 연암의 글쓰기 말이다.

연암은 유교이념만을 강조하는 고상하고 엄숙한 틀에 박힌 글보다는 살아있는 감정에 호소하는 짧은 글로 변화무쌍한 삶을 표현했다. 글의 유일한 생산자이면서 유일한 소비자였던 사대부들의 고리타분한 글쓰기의 틀을 연암은 자유분방한 글쓰기로 깨트렸다.

정조는 이러한 연암의 글을 허접한 잡문으로 취급했다. 이를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규정하고 이런 글쓰기를 금지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요즘의 ‘국가보안법’인 셈이었다.

18세기 연암의 글쓰기는 21세기의 그 어떤 글쓰기보다 더 진보적이고 웅혼하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다음은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설흔·박현찬 지음. 예담 2007』에서 발췌 인용한 것이다.

쓰는 이가 뜻을 읽는 이에게 정확히 전달하면 좋은 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정밀한 글을 써야 한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제자리에서 역할을 할 때 그 글은 읽는 이를 설득할 수 있다.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으면 되고 토막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험한 요새라도 정복할 수 있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로 글의 힘을 믿는 것이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잊지 않고 모든 기쁨과 분노와 슬픔을 글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런 자세로 쓰지 않으면 글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헛것이 된다.

생략과 함축은 겉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읽은 이가 생략과 함축의 의미를 잘 살피면 그 실상이 떠올라 '바로 이것'하면서 무릎을 친다.

속물적인 이익이나 명예가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글을 쓴다면,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글의 힘이 강하다.

“붓끝을 도끼 삼아 거짓을 싹 쓸어버릴 글을 써라!”

거짓 세상을 비판하고 쓴 글대로 현실에 참여하는 작가의 태도야말로, 자신이 쓴 글을 진정으로 아름답고 가치있게 만드는 비법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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