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조선 선비 길을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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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조선 선비 길을 나서다
  • 김철신
  • 승인 2004.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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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인간의 힘'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무렵 우리집은 마당이 달린 제법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전자렌지 등 각종 가전제품을 구비하고, 마당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하며, 부모님이 무척 즐거워하신 기억이 나는데, 내게는 동네아저씨들 틈에서 먹던 삼겹살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누나가 요구하던 용돈의 정액제 지불이었다. 행위별 용돈제가 아닌 월별로 일정액을 용돈으로 준다는 정액급여 방식의 도입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것은 한달간 얼마를 규모있게 운용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방에 쓸수 있는 몫돈이 생긴 것을 의미했다.

이 획기적인 용돈지급방식의 변화에서 내가 처음 구입한 것은 블루마블 놀이판이 아니라 '똘배가 보고온 달나라'라는 동화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의 정교한 장치들 덕분에 자발적으로 교보문고에 가서 피같은 돈으로 책을 덜컥사온 것이다. 그당시 일금 1500원이었다. 창비아동문고에서 나오는 창작동화집을 처음 접하고 나는 너무나 흥분했었다. 톰소여니, 자꾸랑 콩나무랑이니 하는 동화책에 도무지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책읽기를 싫어하던 나에게 창비동화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이후로는 어머님의 유도나 교묘한 장치들이 없이도 나는 보문동의 집에서 교보문고까지 걸어갔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한권은 다 읽고, 한권은 사오고... 그리고 그렇게 사온 책들은 다 읽고 학교에가서 아이들에게 팔았다. 나는 당연히 내 수고비까지 포함해서 1700원이나, 1600원 정도에 팔았다. 책이 잘 팔린 것은 창비동화에 대한 나의 평들이 한 몫했으리라 생각한다. 최고의 동화니, 감동의 도가니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느니, 하는 자극적인 용어들이 동원됐을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일명 '구라'가 좀 센 편이었으니 내가 사온 책들은 별 어려움없이 팔려나갔다. 다만 팔리지 않고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집에 남아있던 책은 단테의 '신곡'을 동화로 편집한 것인데, 아마도 '구라'가 강했던 나조차도 이런 책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사과나무밭 달님', '꼬마 옥이', '못나도 울엄마' 등등의 창비 동화시리즈를 읽고, 울고 웃고 감동에 몸서리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시리즈들이 나를 지금도 소설책에 빠져들게 하는 원천이라 여겨진다.


언젠가 문학잡지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입담꾼으로 황석영과 성석제를 꼽는것을 보았다. 황석영은 특히 술자리에서 성석제는 소설속에서 당할자가 없는 발군의 입담꾼이라는 것이다. 황석영은 황구라로 불릴만큼 입담이 좋다는데 내평생 그와 술먹을 일은 없을듯 싶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석제는 소설을 통해서 그 화려한 입담을 독자들에게 전해주니 내게 성석제는 대한민국 최고의 입담꾼인 것이다.

이 대한민국 최고의 입담꾼 성석제가 작년에 쓴 소설중에 '인간의 힘'이라는 장편이 있다. 액자형식의 소설로 주된 내용은 조선시대 선비 채동구의 일생에 관한 것이다. 채동구는 한마디로 돈키호테같은 사람으로 일생을 통해 네번 가출을 한다. 그리고 소설은 가출시 벌어진 각종의 사건들과 그를 통한 채동구의 정체성 찾기를 그리고 있다. 가볍고 흥분잘하고 능력없으나 순수하고 열정에 불탄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가 눈물이 고였다가... 돈키호테같은 명작의 반열은 아닐지나 우리소설가가 우리정서에 맞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그 핵심은 해학에 있다. 실컷 웃지만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힘. 그것은 우리의 정서에 녹아있는 해학일 것이다. 채동구가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해 허둥대는 우스운 장면에서 두려움을 이겨내는 인간의 열정과 순수를 느끼며 눈물이 고일 것이다. 허위와 가식을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그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일본소설이나 기타의 '명작'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웃음속에 묻어나는 눈물이 있는 소설이 성석제의 소설인 것같다. 내가 어린시절 '자꾸'나 '톰소여'보다 '똘배'와 '옥이'를 좋아했던 것도 그런 이유들인가 보다. 웃음속에서 무엇가 뭉클함을 던지는 것. 그리고 담장에 페인트칠하던 것을 상상못하던 내게 외갓집에서 보던 익숙한 사과나무밭이 나오던 동화. 배우지 않아도 우리안에는 해학과 슬픔이 녹아있는 것같다.

추석연휴에 혹은 그 후라도 토요일밤에 더이상 재미있는 영화가 나오지 않을 때, 성석제의 소설을 읽기를 권한다. 작가정신이니, 주제의식과 구성이니를 떠나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혼자서 히죽히죽 웃을 것이고, 킥킥거리면서 눈물을 닦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인간의 힘'을 2000원에는 팔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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