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우리 운동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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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우리 운동에 대한 단상
  • 박한종 논설위원
  • 승인 2007.09.28 13: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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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번 대선의 의미에 대한 것부터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대선의 중요 전선이 어디인가?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 개혁 대 수구의 대립이기에 여전히 한나라당의 집권 저지가 중요 과제인가?
시장화와 양극화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세력 간의 대립인가? 아니면 구체적 정책인가? 수차례의 대선에서 항상 갈등하고 있는 이런 논의의 구도는 여전히 지금 대선에서도 유의미할까?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이런 논의 구도 자체가 눈앞에 닥친 위험에 대해 너무나도 무감각하다는 것에 있지 않나하는 것이다.

지금 대중에게 대선을 통해 자신이 표출하려하는 바는 더 이상 어떤 구체적 정책도, 어떤 이상에 대한 강열한 열망도 아닌 것이다. 대중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지난 10년의 환멸과 무기력, 그리고 막연한 기대만이 있을 뿐 아닐까?

실종된 대선 정책 속에서 그나마 이슈화 된 것이라곤 대운하 밖에 더 있던가? 이명박의 지지도가 박근혜의 강고한 지지도를 이겨낸 것은 이상(그것이 보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에 대한 강열함보다 부정적 사회현실에 대한 막연한 변화의 욕구에 기인한 것이리라.

386의 정치 실험은 이제 파탄으로 치닫고 있다(물론 386 정치는 386 세대 전체가 아닐뿐더러 어쩌면 386 자체를 대표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386 세대는 이전 기성세대 보다 이상의 것을 요구하였고 요구받았지만, 권력을 부여받고 나서는 실상, 기성세대 이상이 못됨을 여실히 드러냈을 뿐이다. 386 세대가 권력을 잡기까지의 역할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대중의 실망은 386 정치의 변모에 있다. 386은 효과적인 정책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저 한나라당이라도 충분히 그러리라 생각되는 그런 변화를 그저 그냥 저냥 수행하였을 뿐이다.
아마도 이는 어쩌면 탄핵 이후 그 경로가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탄핵 이후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은 거의 사라졌다. 아마도 87년 체제의 완성은 탄핵 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질적 민주화를 위한 동력마저도 탄핵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결과는? 386 정치를 강제할만한 민중적 역량의 정치적 표출이 어렵게 되자 이제 막 권력을 잡게 된 386 정치는 변모되었다.

386 정치는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되었다.

정치적 권력을 잡자마자 시장이란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시장을 강화하라는 자본의 요구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 자본은 국경에 갇혀있지도 않고, 또한 과학-기술적 한계조차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자본이기에 386 정치가 감당하기에는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자 386 세대의 꿈을 이어가던 대중들도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되었다. 꿈을 대신한 막연한 변화의 기대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대선의 출발은 여기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정책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다. 현실을 어떻게 바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꿈 자체를 가질 것이냐 마냐의 문제인 것이다.

한나라당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꿈 자체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그것는 단지 386 정치가 기획하는 꿈꾸기 위한 잠들기의 반복이다.

잠은 들되 꿈이 다시 꾸어질까? 정책의 구체성은? 이 또한 이제껏 각 당에서 제출되는 정책, 그리고 제출될 정책들을 가늠해 볼 때 정책의 문제 역시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나마 반신자유주의는 꿈의 문제를 제기할 여지가 있다. 대중이 꿈을 잃게 되는 원인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경쟁에 내몰리는 처지로 전락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은 파편적인 개인이 되어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오직 남보다 먼저 가는 것이 관건이 된 것이다.

이것에 반대하기에 반신자유주의는 꿈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조차 꿈을 가질 것이냐에 대한 것은 힘들다. 말 그대로 <반>이란 부정성이 꿈이 될 수도, 꿈을 가지는 것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꿈을 가질 것이냐는 다른 면을 볼 때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황우석이나 <디 워>의 논쟁에서 보다시피 대중의 불만이다. 꿈이 없는 불만과 불안 그리고 막연한 변화의 기대는 자칫 언론의 보수화와 정치권력의 보수화와 결합하여 <희생양 찾기>로 귀결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국가가 더 이상 자본을 주도하지 못하겠지만, 시장의 불만을 소수자에 대한 탄압으로 사회를 안정화시킬 우려 말이다. 물론 이런 우려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의 현실적 토대를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획할 세력의 배치가 여의치 않다면, 그나마 필요한 것은 꿈이다. 왜냐하면 꿈, 이상주의는 곧 연대성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꿈을 잃었다 한다면 다시 꿈을 형상화해야 하든지 적어도 대중이 다시 꿈을 갖고자 하는 의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 이상주의자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상주의에 대한 희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대선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대중의 희망을 조직할 수 없다면 희망에 꿈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정책도 이념도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면, 희망을 조직하기보다는 꿈을 가지려하는 정서를 조직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상도 없이 어찌 이상주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하느냐이다. 이는 반신자유주의가 논리가 아니라 정서로서, 부정적 정서가 아니라 긍정성의 정서로서 어찌 가능하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선에서의 보건의료운동의 역할을 이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중이 꿈을 잃지 않도록 하기위한 출발점으로서의 최소한의 영역이 보건의료운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에 제도적으로 사회적 연대성을 이루는 몇 안 돼는 영역이 보건의료이다. 물론 이조차 그 불완전함 때문에 불만이 높다.

보건의료 영역이, 바로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연대로서 의료의 공공성이 대립하는 이 지점이 반신자유주의가 긍정적 정서로서의 꿈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때, 적어도 바로 이시기의 대선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의 실현성과 구체성보다는 희망으로서의 상이다.

지금의 보장수준을 몇 년 동안 얼마를 늘리고 다음 몇 년에는 얼마를 끌어 올리고 하는 수치적 공약이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것,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양극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 또는 그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또는 “왜”를 대선의 중요 의제로 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리라. 보다 구체적으로 고려하면 아마도 “무상의료”라는 구체적 정책의 상보다는 “모두에게 건강을”이라는 식의 약간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대중의 가치관에 개입하는 그러한 것 말이다.

사실 이러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보수당과 노동당이 “영국병의 치료”, “제3의 길”,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식의 구체적 정책이 아니라 바로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가지고 집권을 다투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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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주 2007-10-01 12:41:52
이번 대선이 주는 느낌들을 아주 정확히 꼬집어 주셨네요. 왜 이리 재미가 없을까 했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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