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아름다운 이유] 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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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가 아름다운 이유] 괘릉
  • 한명숙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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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릉

하!
히히
낄낄낄
험험 , 험험 요놈 요놈들
요 요상한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쾌릉으로 오시오.
차를 타고 얼렁 올 생각말고
짝꿍 손잡고 깡충깡충 까불며 올 생각말고
휘어진 소나무 벙긋 웃으며 양쪽으로 서 있는 길 따라 조용히 오시오

아무 소리 안들린다 불평말고
왕릉에서 왼쪽편 첫째 사자상의 머리를 두드리시오.
까르르 웃음알들이 사장상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어질 것이오
네 마리 사자가 왕릉을 지키는 지엄한 임무를 받고도 장난끼를 이기지 못해 천년을 그렇게 웃고 서 있소.
릉의 주인은 난감하고 바라보는 이의 가슴은 정겹소.
그 아래 두 문인은 이 장난끼 많은 사자들을 흘겨보며 체면에 얼굴 붉히지 못하고 점쟎만 빼물고 있고 맨 아래 서역무인은 칼을 차고 ‘험 험’ 아무리 사자들을 꾸짖어도 돌로 된 처지에 무엇이 무서울까 싶어 사자는 아직도 저리 웃고만 있소.

한 순간의 죽음으로 영원을 지키려 했던 왕이 우습기도 하고 죽는 일이 굳이 슬픈 일 아님을 알기에 네 마리 사자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는데 그대 귀에 들리지 않는다니 답답한 일이오.

휙 휙
쉬 쉬 쉬--
쪼르륵 쪼르륵
이 재미 있는 소리 듣고 싶은 사람은 괘릉으로 오시오
왕릉 뒤 소나무 숲은 좋은 소리를 낼 만큼 성숙하였고 새와 바람이 간간히 추임을 해주고
릉을 감싸는 쥐나 개나 열 두가지 동물들 밤이 익으면 왕릉 밖으로 나올 준비에 숨죽이며 힘겨워 하고 있소.

그대가 권위를 자랑하려 할 때 우리는 더 많이 웃을 것이고
그대가 모두를 거느렸다 시위할 때 우리는 그만큼 멀어지고
그대가 달려와 안기고자 품을 벌릴 때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오
이 말이 사실인지 알고 싶소
그럼, 노을이 고은 날
괘릉으로 오시오.



경주는 왕릉의 도시다. 시내라고 불리는 중심가가 왕릉들로 둘러싸여 있고 외곽은 말 할 것도 없지만, 남산 자락에서 등산을 시작할 때도 왕릉을 바라보지 않고 경주를 둘러보는 것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확-’들어내며 폼을 잡고 있는 능이 있는가 하면 규모나 크기로 보아 왕릉은 분명하지만 성난 아버지를 피해 숨은 개구쟁이 꼬마처럼 아주 엉뚱한 곳에 살며시 숨어 있는 능도 많다. 괘릉은 경주에서 울산가는 국도 변에 위치해있는데 팻말이나 주변에 다른 주목할 만한 문화재가 없다보니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처음 그곳을 알게 된 것은 4년 전 병원이전 문제로 알게된 인테리어 업자와 그 근처에서 점심을 함께 하다 불현듯 그가 자신의 아내와 첫 키스를 나눈 장소를 보여 주고 싶다며 그 곳으로 나를 데려 갔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와 함께 괘릉의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그가 왜 그 곳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데리고 왔고 그 곳에서 입맞춤을 하고 싶어했던가 쉽게 이해가 되었다.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들과 천년 세월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무인상과 무신상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는 듯이 장난스럽게 서 있는 사자 네 마리는 방금 내가 걸었던 도로변과는 또 다른 세상을 시원하게 열고 있었다. 첫눈에 난 그 장소에 반했고 식구들 또는 친구들과 몇 번을 다시 찾아갔지만 아담하고 이쁘다는 그들의 수긍 외에는 괘릉에 대한 나의 감동을 이해하는 이는 없었다.

문화재에 대한 이해나 석물에 대한 지식으로 괘릉을 이야기 하는 것은 내 능력 외의 문제지만 능을 찾아오는 이들을 향해 시원하게 팔 벌린 듯 하면서도 왕으로서의 오만을 잊지 못하고 사자와 무인, 그리고 문인들을 멀찌감치 배치한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 열심히 괘릉을 말하고 싶어했고, 말하는 자신 속에서나마 기쁨을 느꼈다.

얼마 전 호감이 가는 스무살 초반의 대학생 아이와 함께 다시 괘릉을 찾아갔다. 아이의 싱싱함이 내게 눈부셨고 그 아이가 삶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내게는 귀엽기도 해서 동행을 요구했더니 선뜻 응한 것이다. 아이는 순진하게 내가 그 곳에서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나 짐작하고는 맑은 눈을 빛내며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고, 나는 아이의 맑은 피부가 햇살에 살짝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을 훔쳐보고 있었다.

아이와의 짧은 산책 내내 내 눈은 길고 곧게 뻗어 있는 아이의 몸과 밥벌이를 모르는 그 정신의 방황을 바라보며 그 아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고, ‘나이 들어감’ 속에서 슬며시 자라는 나의 허약함이 더 싫기도 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아이를 바라보고, 능을 바라보고, 사자들을 바라보며 젊음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그 속에 잠시라도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나는 긴 한숨을 몰래 쉬고 있는데 아이는 내 어둠을 전혀 읽지 못했다.

아이에게 성장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는 그럴 듯한 충고를 하면서 ‘너는 왜 이리 아름다우냐? 너의 윤기 있는 얼굴을 잠시라도 만져볼 수 있겠니?’ 속에서 연신 터져 나오는 본능의 언어를 힘겹게 떨쳐내며, 점잖은 사람됨을 겨우겨우 챙기고 있었다. 네 마리의 사자들만이 나의 속 내막을 알고 있는 듯 연신 싱글거리고 아이와의 대화 속에서 일어나는 거짓과 위선은 그리해서 자유롭다고 느끼기도 했다.

어쨌던 세월의 간격을 느끼는 발바닥은 점점 뜨거워져 간다. 젊음에게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고 싶을 때가 생기고 그 욕망만큼 비참하고 자존심 상할 때도 생긴다. 그러다 보니 입만 살아서 어설픈 과거가 잘 윤색되어 입 밖으로 진출할 때가 많지만 가슴 속 구멍만 키울 뿐이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더 소중하고, 많이 깊이 사랑하고푼 욕망이 주책없이 덤벼들 때가 많고 그런 마음을 볼 때마다 나는 쾌릉 주변을 걸었고 걸으면서 아이를 바라보았고, 아이의 젊은 침묵에 당혹해하며 그 침묵을 깨고 싶어 안간힘을 다 했다.

지금 아이가 아무리 젊다 하여도 아이도 나도 죽음을 비껴 갈수 없다면 삶의 모순과 엉킴도 그 끝이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면 아이가 괘릉을 다시 찾는 날 동행했던 중년의 여자를 잊더라도 삶의 웃음과 화해를 막연하게 기다리며 말해주려 했던 괘릉의 아름다움은 여전하기를 바래어 보았다.

삼십 분간의 괘릉에서의 대화를 끝내자 아이는 분홍의 얼굴로 웃었고 나는 붉은 색깔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아이에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각자의 길로 어서어서 가야 내가 덜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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