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풀빵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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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풀빵정신’
  • 송필경
  • 승인 2023.06.19 16: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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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깊이 알기⑤: 전태일과 묵자의 겸애(兼愛)

1. 축의 시대

인류는 역사 이래 지금 이 순간까지 왜 이리 난폭했고 왜 이리 잔인한가? 전쟁은 한 순간도 끊이지 않았고 억압과 착취는 멈춘 적이 없었다.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Pensées)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개는 나의 것이다.’
‘저기는 내가 햇볕을 쬐는 곳이다’라고 아이들은 말했다.
여기에 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약탈의 기원과 상징이 있다.

그렇다! 네 것 또는 우리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힘 센 인간들이 힘닿는 대로 남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비참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기원전 1,300년 즈음 생겨난 철기문명으로 농업 생산력과 무기 생산력이 급속히 발전했다. 철기로 무장한 탐욕이 강한 무리들은 대규모 폭력과 살상을 일삼는 무자비한 전쟁을 저질렀다.

대다수 인간은 공포를 마주보며 삶의 공허를 느껴야 했다. 그러자 중국, 인도, 중동, 그리스 등 당시 문명지역에서 인간의 폭력을 막자는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화에 이끌리던 사고방식에 이성이 도전장을 내밀었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터져 나오고 철학적인 성찰에 따르는 윤리적인 각성이 우후죽순 돋아났다.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Age)’라 부른다.

이 용어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규정한 용어로 기원전 900년에서 기원전 200년까지 약 700년 간 세계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탄생한, 인류사에서 인간윤리의 창조성이 가장 뜨겁게 폭발했던 경이로운 시기를 일컫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의 힘을 경배하던 인간이 축의 시대에 들어서서 시선을 자신의 마음으로 돌려 내면을 파고들며 자아를 찾았다.

축의 시대라 일컫는 시기에 인류의 의미 있는 사상이 거의 다 생겼다. 숭고한 사유의 천재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류는 남의 고통과 비참을 함께 슬퍼하는 공감과 연민과 자비의 정신을 깨달았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묵자가 활동했고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자이나교, 그리고 붓다가 등장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에레미야, 이사야가 나타났고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태어났다.

깨달은 자들의 이때 말씀은 인류 정신발전의 중심축을 이루었고 그 이후 인류는 한 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축의 시대』(2010. 정영목 옮김. 교양인) 저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은 말한다.

축의 시대 이후 동양과 서양이란 양(洋)의 동서(東西)와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의 고금(古今)을 불문하고 인간의 위대한 사상은 언제 어디서나 비슷했다.

약 2,500년 전 축의 시대 그리스 땅에 있었던 플라톤의 이상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론의 관점은 2,000여 년이 지난 조선 땅에서 이퇴계의 이기이원론(이상론)과 기대승의 이기일원론(현실론)의 관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중국 도가의 무(無)와 인도 불교의 공(空)은 다소 다른 개념이지만 중국 대승불교에서 서로서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중용의 도(道)는 기독교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중국 묵자의 겸애(兼愛), 차별 없는 사랑은 이스라엘 예수의 인간사랑과 매우 비슷한 말이었다.

2. 묵자의 겸애

축의 시대인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학파와 어깨 겨누는 학파를 이끌고 사회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 중 하나는 묵자(墨子 기원전 470년?〜391년?)였다. 묵자는 목수 일에 능한 노동자 출신이면서 사상가였다. 인류사에서 아주 보기 드문 지성인이었다.

묵자는 노동의 중요성을 주장한 첫 사상가였다. 짐승들이야 털가죽이 있고 자연상태에서 먹을 것만 있으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은 의식주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빈곤해 살기 힘들고 나라는 어지러워진다고 보았다.

묵자의 사상에는 아랫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바느질하고 농사짓고 있으니 지도층도 열심히 정무를 봐서 그들이 맡아야 할 노동을 하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묵자를 따르는 노동자 무리가 이룬 묵가(墨家)의 독특한 특징은 모든 사람을 가리지 말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겸애(兼愛)’를 부르짖고 실천했다.

묵자는 옳은 일(義)을 실천하려면 하늘의 뜻에 따르라고 했다. 하늘의 뜻은 함께(兼)이며, 차별(別)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묵가에서 ‘함께’는 ‘의로움으로 바로 잡는 것’이며 ‘차별’은 ‘힘으로 바로 잡는 것’이다.

큰 자는 작은 자를 공격하지 않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많은 자들은 적은 자들을 해치지 않고
약삭빠른 자는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으며
귀한 자는 천한 자에게 오만하지 않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건장한 자는 늙은이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묵자의 정의란 ‘약자를 챙기고 살피는 것’이었다.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사랑하라는 묵자의 외침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만 사회적 약자였던 노동자와 농민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묵자는 자신과 자기 가족, 그리고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한다면 그들을 감싸는 혈연‧지연 따위로 뭉쳐서 공동체의 공정과 공평에 균열을 일으켜 세상은 혼란으로 치닫는다고 주장했다.

묵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함께 아우르는,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겸애를 이야기했다. 겸애의 강조는 유가에서 효를 강조하면서 내 부모와 남의 부모를 구별하는 별애(別愛)와 차별하기 위해서였다.

농민과 노동자,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피난민과 고아, 그리고 부양받지 못하는 노인들은 묵자의 겸애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따랐으며 당대에는 공자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제공= 송필경)
(사진제공= 송필경)

3. 아이스킬로스의 인간애, 예수의 사랑, 프랑스혁명의 박애, 그리고 동학의 하눌님

예수는 생전에 기독교가 성립한 후에 유행한 삼위일체나 원죄같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가 외친 사랑은 묵자의 겸애와 바탕이 비슷했다.

지금 우리 대형교회 사람들의 눈에는 놀랍게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는 매춘부, 문둥병자, 간질병자, 로마의 세금을 징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세리 등 ‘죄인’들과 사귀었다.

예수의 행동은 한없는 중생(衆生)을 어여삐 여기는 부처의 마음(無量心)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범위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받아들이는 사람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나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는 등 실제의 자비심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했다. 그들은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지우는 조용한 삶을 살아야 했다.

묵자보다 연대가 조금 빠른 축의 시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신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인간애(philanthropia)라고 불렀다. 이 말이 후에 박애(philanthropy)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우애(fraternity), 형제애(brotherly love)와 같은 말이다.

이 인간애는 예수님 말씀의 핵심인 ‘사랑’에서 뜻이 명확해졌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내는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인간이 서로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아가페’에서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인종이나 계급이나 성별을 초월한 인간상호의 형제애와 우애, 박애의 관념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 사랑의 정신이 종교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에서 나타난 것은 예수 시대에서 1,800여 년 지난 1789년 프랑스대혁명에서였다.

프랑스대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를 구호로 외친 인류사에서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 외침은 230여 년이 지난 2023년 이 땅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삶의 조건이다.

프랑스대혁명 영향에 따른 우애(박애, 형제애)의 윤리는 이렇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고 항상 자기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것을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축의 시대 공자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고 한 간곡한 말씀과 같은 윤리다. ‘내가 종노릇하기 싫으면 남을 종으로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게 축의 시대부터 요구한 윤리적인 자세다. 인간 모두가 서로를 동등하게 대접하고 존중하라는 윤리가 우애요, 형제애요, 박애다.

1860년 대 조선 땅에서 수운 최제우의 동학에는 남자와 여자, 신분이 귀하거나 천하거나 차별이 없었다.

수운 사상의 뿌리는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하늘님의 마음이라는 걸 깨닫고 모든 사람이 서로 하늘님처럼 공경하라는 뜻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자연은 우리를 낳고 기르는 부모와 같으니 모시고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사람뿐만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까지 부모를 대하듯 하라고 당부했다. 시대를 훌쩍 앞선 ‘생명평화사상’이었다.

누구나 하늘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만민평등사상은 프랑스대혁명의 우애(박애) 정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4. 전태일의 풀빵정신

전태일은 너무나 가난한 떠돌이생활 때문에 초등학교 2년, 비정규 야간중학교(고등공민학교) 1년을 다녔을 뿐이다. 학력이라 말할 것이 없다.

짧은 삶에 비해 전태일이 남긴 글은 많다. 수기나 일기에 괴테를 비롯한 몇몇 외국 시인을 언급하고 시를 인용한 부분이 있지만 체계적인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한 흔적은 없다.

‘대학생 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절실한 소원이었을 정도로 인문학의 전문용어를 몰랐다. 스스로 깨쳤을 뿐인데도 글에는 품위가 있으며 시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철학적이라 할만한 생각이 깊게 배어 있다.

전태일은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같은 길거리 비렁뱅이 생활을 했다. 16살 되던 1964년 봄쯤에 봉제공장이 즐비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취직했다. 14시간 노동한 시다의 일당은 커피 한 잔 값인 50원에 불과했다. 아침에는 구두닦이로 밤늦은 저녁에는 껌과 휴지팔이를 해도 끼니를 때우기 어려웠다. 첫 출근하던 날 소감을 적은 수기이다.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지도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되지 않았다.

전태일은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시다 시절에 평화시장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괴로워했다. 전태일은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함께 일하는 열 두어 살 먹은 소녀들은 대부분 누렇게 뜬 얼굴에 못 먹어서 쾡한 눈동자를 한 채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이나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은 먼지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주린 배를 안고 온종일 햇빛 한 번 못 보고 쏟아지는 졸음을 막으려 타이밍약을 먹으며 뾰족한 바늘 끝으로 제 살을 찍어냈다.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하는 데도 늘 하루 생계가 위태롭기만 하고 병든 부모님께 약 한 첩 해드릴 수도, 자라는 동생의 학비를 댈 수도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의 돈 잘 버는 부모들을 위해, 청계천 어린 여공들의 꿈은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싹둑싹둑 잘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어린 여성노동자를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에게’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태일은 아침 8시에 출근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9시쯤 되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봤다. 하루 14시간 일을 해도 사장님 커피 한 잔 값인 일당 50원으로는 부양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없었다.

전태일은 메마르고 비참한 사회 현실에서도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의 굶주림을 모른 체하고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형편도 어린 여성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전태일은 집에 돌아갈 차비 15원으로 1원짜리 풀빵을 사서 나눠줬다. 그리고는 밤10시에 퇴근하면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집까지 12km 가량을 서너 시간 터덜터덜 걸어갔다.

5. 풀빵정신의 의미

전태일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어린 여성노동자를 핏줄인 여동생과 차별 없이 사랑했다. 그들에게 풀빵을 사준 행위는 ‘겸애’, 이를테면 공감과 연민과 자비의 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축의 시대 노동자 사상가 묵자가 목놓아 외치던 겸애였다.

전태일의 겸애는 붓다의 자비심, 아이스킬로스의 인간애, 공자의 어질음, 예수의 아가페 사랑, 프랑스대혁명의 구호인 우애(박애), 그리고 우리 동학의 하늘님 공경과 다름이 없었다.

묵자 이후 2,400여 년이 지난 조선 땅에서 무지렁이에 불과한 하층 노동자가 축의 시대 이래 최고의 윤리를 구현해 천박한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린 사실은 우리 노동운동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축복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슈바이처, 인도에서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들의 봉사와 희생은 인류애를 몸소 보여준 소중한 사례로 꼽고 있다. 슈바이처는 독일인 의사였고 데레사는 가톨릭 수녀였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인이 아니었고 인도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희생과 봉사에 서구언론이 크게 관심을 보였고 덕분에 마더 데레사의 경우 유럽의 수많은 세력가들의 기부를 받으며 활동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프리카인과 인도인의 삶을 왜곡한 유럽의 제국주의를 바로잡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해, 억압 받는 이들의 삶에 질적 변화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지는 못했다. 비판자, 특히 마더 데레사를 혹평하는 측은 ‘자비를 판다’고 했다. 그 비판을 온전히 악의라고만 할 수는 없다.

전태일의 ‘풀빵정신’을 미담 정도로 보고 이런 미담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약화한다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전태일의 자기헌신과 희생으로, 노동자의 삶을 억압하는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 질서의 근본을 바꾸려고 시도한 맹렬한 실천은 겸애에서 비롯했다.

전태일은 겸애에만 머물지 않았다. 겸애에 이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통찰한 점이야말로 전태일이란 노동자의 진정한 위대성이다. 전태일이 어린 여성노동자에게 보인 겸애의 마음은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또 그런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역사에 드러냈다.

우리 노동운동 속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노동자, 기간제 교사, 대학강사 등 수많은 불안정한 노동자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직 눈에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태일의 겸애를 실천한다면 노동은 자본의 노예에서 비로소 해방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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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선 2023-06-20 12:09:12
전태일 좋아하는 치의들은 풀빵만 먹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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