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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어머니 영웅' 29,489명[기획연재] 제3부 여성박물관 (11),(12),(13),(14),(15)
송필경 | 승인 2009.12.29 19:20

본 연재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연재글 첫회부터 읽기를 당부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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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2004년 남부 통계이다. 전체 어머니 영웅이 29,489명이고 7,897명이 생존하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20,486명, 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 여기에서 희생은 모든 죽은 이 들에게 쓰는 것이 아니고 총을 들고 싸우거나 전투 중에 죽은 이들에게만 사용하고 있다. - 이분들은 어머니 베트콩이었거나 어머니 군인들이었다.』

12
『여기서부터는 호찌민과 여성에 대한 설명이다. 호찌민의 유언은 수십 번도 더 고쳐졌다고 한다. 이것은 1968년 5월에 쓴 거의 마지막 유언의 일부이다.

“우리 당과 정부는 여성들을 양성하고 여성들을 지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여성들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13

   
 
  ▲ 1911년 6월 4일 한 젊은이가 사이공에서 프랑스 여객선 아미랄 라투세-트레비유호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이것은 호찌민 시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이다. 1911년 호찌민은 사이공 부두에서 상선 요리사 보조로 취직해서 프랑스 상선을 타고 조국을 떠난다. 호찌민이 배를 타고 떠난 부두에 지금 호찌민 박물관을 세웠다. 베트남에서는 호찌민이 구국의 길을 떠났다고 부른다.

19911년 사이공을 떠난 호찌민은 죽을 때까지 여기 오지 못했다. 조국을 떠났다가 30년 만에 중국 국경을 통해 베트남에 들어왔다.

30동안 항미 투쟁을 이끌다가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사망한다. 호찌민은 “남부는 나의 심장이다”라 고 늘 말했다. 호찌민이 눈물을 보였던 몇몇 역사적 순간이 있는데 이는 남부와 관계가 있었다. 이 장면은 국회에서 “남부는 싸우고 있다”는 보고를 들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눈물을 훔치는 호찌민  
 
1954년 디엔 엔 푸 전투에서 베트남이 대승리해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제네바협정이 체결한다.

그 내용은 17도선을 임시 분계선으로 해서 남에서 싸웠던 사람은 남에 남고, 북에서 싸웠던 사람은 북에 집결해서 17도선으로 분단해서 2년 후 총선을 실시하여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을 지엠 정권과 미국이 파기를 해버렸다. 이것이 항미 전쟁을 촉발한 근본 원인이었다.』

14
『어머니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자. 1954년 남에서 북의 편을 위해 싸웠던 사람을 데려가기 위해 북에서 남쪽 항구로 배가 들어온다.

이 장면은 기록영화 자료로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굉장히 느낌이 달랐다. 한국의 어머니와 베트남의 어머니가 너무나 다르구나. 이럴 때 헤어지면 내 자식 언제 다시 볼 줄 모르는 상황인데 북을 위해 싸웠던 사람이라도 남이 기반인 사람은 모두 북쪽으로 갈 수 없었다.

   
 
  ▲ 베트남전쟁 때의 어머니 영웅들  
 
보통 아버지들만 가는데 아버지 혼자 보내기가 뭐해서 자식을 한명 딸려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가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북으로 간다는 장면을 보면 배가 떠날 때 아내, 어머니가 전송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처럼 껴안고 땅치고 통곡하는 어머니가 없었다.

망고나 부 스아(Vu Sua : 어머니 젖이라는 과일. 남부에서만 생산된다)주면서  네가 호찌민 주석을 만나면 주라고 당부한다. 또는 흙을 주면서 호 주석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장면이 많았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만들어진다고 치더라도 이 장면을 보면서 베트남의 어머니들은 참 담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5
『유명한 전쟁소설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의 저자 반레는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17세 반레가 군에 입대를 신청하고 바로 전날까지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모른 채 했다.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남하하기 위해 입대하던 날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날 따라 아침 밥상에 반레 선생의 밥그릇에만 밥이 수북하고 생선 한 마리가 올라와 있었다. 반레는 장남이다.

평소에 어머니는 너는 큰 애이니까 하면서 동생들에게 밥을 많이 주고 자신에게는 조금만 주셨다고 한다. 더구나 생선이 밥상에 올라오는 경우는 참 드물었다. 혹 올라오더라도 토막을 쳐서 올라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전송도 없이 집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송필경  spk1008@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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