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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건약 그리고 30년[건약 30주년 특별기고]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대구‧경북지부 이승은 지부장
이승은 | 승인 2019.10.17 15:01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전국을 민주화 열기로 달아 올리던 그 때, 보수적이라고만 치부됐던 약사사회에서도 호헌철폐를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이후 서명을 주도했던 약사들은 자신의 지역 곳곳에 뜻 있는 약사들을 규합해 단체를 만들었다. 부산의 '약사의 소리'. 서울의 '건강사회실현약사회'. 대전의 '타래'. 광주·전남지역의 '건강사회실현약사회'. 대구의 '청년약사회' 등이었다. 이들 지역 약사 조직들은 지난 1988년부터 서로 교류해 오다 지난 1990년 1월 21일 전국 단일 조직인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를 창립했다.

이보다 앞서 1987년 겨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1989년 4월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가 창립됐고, 이어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노동건강연대 등이 건약과 함께 연달아 창립되면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또한 보건·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건약은 보다 건강하고 인간다운 사회 건설을 위해, 혹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건강이 구현되는 총체보건 실현을 위해 약사로서, 지식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실천에 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이 국민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음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건약은 노동자 건강 문제에 대한 '산업재해 활동', 도시 빈민을 위한 진료소 활동, 의료보장제도의 연구와 실현을 위한 실천활동을 펴렻왔으며 현재는 전반적 보건의료체계 변화와 의료 영리화 저지를 위한 역할을 실천하고 있다.

본지는 내년 창립 30주년을 맞는 건약의 역사와 활동을 돌아보고 기념하기 위해 기획연재를 진행키로 했다. 그 첫번째로 건약 대구경북지부 이승은 지부장의 기고글을 게재한다.

- 편집자

 

(제공 = 건약)

나는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우연히 들춰보게 되는 사진에는 늘 당시의 치기나 욕망, 아니면 교만함들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싫어한다. 어차피 지나버려 이젠 어떻게 해볼 도리조차 없는 시절의 나를 만나 굳이 부끄러움을 외면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30년이라니 맙소사다.

모두들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많은 사람들한테 내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뭔가 특별한 계기나 굳센 의지 같은 게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듣는 편이다. 아주 웃기게도 여태 살아오면서 내가 한 모든 선택은 나의 어리석음과 게으름과 이기심의 적절한 배합이 가져온 결과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법대 진학을 강렬하게 원하시던 아버지의 눈빛을 외면하고 이과를 선택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식들을 대학 보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했던 부모님의 어깨를 덜어줘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빨리 졸업해서 돈 버는 게 가능한 약대로의 진학. 결정적으로는 대학을 졸업할 당시 처절하게 외치던 ‘조국과 민족의 미래에 내 한 몸을 기꺼이 내어주리라’하던 구호와는 달리 먹고 사는 것이 적당히 보장이 되면서 대학시절 내내 외쳤던 ‘민주’나 ‘정의’라는 단어를 배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조직이 있음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약사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까지.

그러나 세상은 나의 잔머리보다 항상 우위에 있어, 뜻 하는 대로 먹고 사는것과 진보적인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해내기 위해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해야만 하는 삶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약사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하는 능력, 의료현실의 모순과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시민단체 일원으로서의 사회적인 역할, 게다가 집안 살림이며 아이를 낳아 길러내는 일 여기에다 부모님과 아픈 동생에 대한 책임까지. 쉴 새 없이 터지는 폭탄 같은 시간을 헤쳐 나오는 동안 그들은 늘 나의 곁에 있었다.

건약 대경지부 2002년 정기총회 산행 (제공 = 이승은)

의지와 열정만 가득한 철없던 시절에 만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보자던 결의를 쉽게 해버린 우리가, 밤마다 모여 토론하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냅다 싸우면서도 결국은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적 절차라는 걸 배우고, 산업재해와 관련된 사업이나 무료투약 사업을 하면서 결국 더불어 함께 사는 평등한 세상이란 사회적 제도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책이 아닌 현장에서 배우던 그 모든 시간에 그들은 함께 있었다.

건약의 목적, 역사의식, 사회적 책무 정도는 기억의 어딘지 모를 구석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한 30년의 세월을 지나도록 특별할 것 없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일상처럼 모이고, 서명하고, 기부하고, 간혹 시위에 나서기도 하고, 방문약사 사업을 하고, 약물오남용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 서로 즐거워하고, 주어진 이 많은 일상이 힘들다고 느껴지던 순간이면 그저 스쳐지나가듯 손잡아주던 그들에게서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글자의 정의를 읽는다.

하여 건약은 나에게 사람들, 사람과의 관계, 배려, 믿음의 또 다른 단어이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게 뻔 한 그들과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라는 밋밋한 엔딩이 아닌 ‘그 후로도 그들은 좀 어설프고 고민하고 투닥거리면서도 이럭저럭 왁자지껄 부산스럽게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하는 정도의 엔딩을 꿈꾸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바쁘다.

이승은 (건약 대구경북지부장)

*본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승은  gcnews@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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