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에 이른 세월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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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이른 세월호 기억!
  • 송필경
  • 승인 2021.04.15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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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시인 엘리엇(T.S.Eliot; 1888-1965)은 『황무지』란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 영국 시인은 4월에 일어난 우리의 모진 역사를 알았을까?

동백꽃이 순식간에 후두둑 떨어지듯 제주의 수많은 남녀노소 생명이 동백꽃처럼 떨어진 4.3 제주,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이른바 인혁당 인사 8명이 사형대에 오른 4.9 인혁당, 배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순응한 학생 262명이 고스란히 바다에 수장된 4.16 세월호, 참을 수 없는 독재에 항거하다 숨진 4.19의 젊은이들까지 우리의 4월은 정말, 정말 잔인한 달이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나는 베트남 하노이에 있었다. 아침에 폰 인터넷에서 진도 인근에서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을 태운 여객선이 기울어졌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러려니 했다. 4월 19일 귀국해서 그동안의 세월호에 관한 뉴스를 검색하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지난 2003년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떠올랐다. 나는 지하철 참사 직후 시민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지하철 방화가 일어난 중앙역을 찾았을 때다. 지하철 복도 사방은 온통 검은 연기에 거슬렸고, 희생자 가족들은 코를 심하게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유족대책위를 꾸리고 있었다.

그때 희생자 가족에게 여러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야기는 26살 청년이 마지막 순간에 애인에게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어요’라는 문자를 보냈다는 일이다.

열차는 화로처럼 싯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고,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검은 화학 연기를 들이킬 수밖에 없는 청년은 지옥에서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으리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아마 곧 새까맣게 타들어가지 않았을까.

배가 뒤집혀 바다에 빠지면 선실에는 공기층(에어 포켓)이 생기기 마련이다. 세월호의 뒤집힌 선실 문틈으로 들어온 차가운 바닷물이 서서히 아이들의 발목부터 차올라 마침내 입과 코를 잠기게 했을 것이다. 차가운 바닷물에 저체온으로 빨리 사망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선실에 물이 다 차올라 더 이상 숨 쉴 수 없어 사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망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건강한 아이들일수록 더 긴 시간 동안 더 지독한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아이들은 살아 있는 순간까지 친구를 부여잡고 얼마나 울었을까? 아이들은 도저히 부술 수 없는 유리창을 얼마나 두들겼을까? 숨 넘어 가는 순간까지 아마 선실 벽을 손톱이 다 닳도록 긁지 않았을까?

그렇게 몸부림치는 동안 아직 피어나지 않은 청춘들은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고, 무엇을 가장 원망하고, 또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을까? 

용감한 구조 요원? 태어난 세상?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름다운 이성? 자신을 낳은 가난한 부모? 하지만 다정했던 부모? 순박한 우정?

차오르는 차가운 바닷물과 점점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말이다.

오후 늦은 시간에 언론에 나타난 박근혜 대통령은 잠이 덜 깬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동안 해경을 비롯한 구조대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저 검푸른 깊은 바다 속을 물끄러미 쳐다봤을 뿐이었다. 

아니다!

배가 기울면서 바다에 빨려들어 갈 때 선내 스피커에서는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다. 선원들은 대부분 탈출하고 학생들은 선실에서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해경은 갑판에서 빤스만 입은 선장을 재빨리 구조해 해경 책임자 집으로 데리고 갔다.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드(Birkenhead)호는 군인과 민간인 638명을 태우고 가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부근 바다에서 캄캄한 밤에 좌초했다. 구명정 3척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은 180명뿐이었다.

병사들은 횃불을 밝히고 구명정에 아이와 여성만 태웠다. 병사 전원은 의연한 자세로 갑판에 꼿꼿이 있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 건장한 병사들은 약자를 먼저 배려했고, 약자의 대피를 도와주고 희생했다. 그때가 1852년이었다. 세월호 사건보다 162년 전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자기만 살겠다는 못된 이기심이 가득한 아주 천박한 사회이다.

버큰헤드호의 교훈은 이후 대형 해난 사고에서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행동 지침이 되었다. 지난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도 선원들은 버큰헤드호의 정신을 고스란히 발휘했다. 인기 있었던 영화 ‘타이타닉’은 그런 모범을 잘 보여주었다.

버큰헤드호와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한 밤중에 일어났다. 세월호 침몰은 해가 훤히 뜬 대낮같은 아침에 육지 바로 곁에서 침몰했다. 주위에 구조할 수 있는 배가 있었고 심지어 헬기까지 동원됐다. 그런데도 선실에 갇힌 학생 한 명도 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구조 못한 게 분명 아니었다고 나는 지금까지 확신하고 있다.

정녕 왜 그랬을까?
정녕 왜 그랬느냐 말이다! 

세월호 기억 시력표(제공= 송필경)
세월호 기억 시력표

나는 지난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타오른 촛불 집회에 정말 열심이었다. 환갑 넘은 나이에 추운 밤 나섰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박근혜가 저지른 여러 국정의 무능과 부패에는 그러려니 하며 그렇게 분노하지 않았다. 박근혜가 세월호 사고의 책임을 회피하는 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마 나와 같은 평범한 수많은 시민이 밝힌 촛불은 태양보다 더 빛났으며, 박근혜를 기어코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정치 행동이었고, 마침내 촛불정부가 들어섰다. 박근혜가 감옥에 간 것을 아주 마땅하게 생각했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을 했다.

다음 해인 지난 2018년 4월 16일 촛불 정부의 진상 규명을 기다렸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다음 해도 기다렸고, 그 다음해도 기다렸다가 어느덧 2021년 올해를 맞았다.

촛불정부 아래서도 세월호 침몰 진상에 대해 박근혜 정부 때보다 다른 어떤 말도 없다. 오늘 공소시효 7년이 끝나면 더 이상 세월호를 거론해서는 안 되는가? 

박근혜의 정부는 ‘정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럼, 세월호 사고는 그들이 말한 단순한 해상 교통사고였던가. 세월호 침몰은 내가 상상한 그 추악한 무엇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박근혜 정부는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정부는 세월호 진실을 묻는 사람들을 희롱하거나 비하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가. 우리는 박근혜가 세월호 사건에서 보인 어처구니없는 지도력에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의 분노는, 나의 촛불은 헛된 것이었던가. 
세월호 4.16은 잔인한 기억이 아니란 말인가.
박근혜를 석방하자는 발언은 정당하다는 말인가.

세월호 기억 시력표의 글씨 “잊지 않을게”는 점점 작아지더니만,
이젠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촛불정부에서 세월호 기억을 이젠 깨끗이 지워야 하는가?
누군가에게 올바른 대답을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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