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학,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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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학, 오래된 미래의 가능성
  • 김해완
  • 승인 2020.03.11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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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의학을 찾아서 15]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김해완

'어쩌다 보니' 본지와 인연을 맺게 된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김해완 씨는 지난해 8월부터 격주로 『쿠바의 의료 실험 - 일상의 의학을 찾아서』를 연재를 시작했다.

김해완 씨는 아바나 의대를 다니면서, 의대생으로서 보고 또 경험한 쿠바 의료시스템을 '일상의 의학'이라 칭한다. 대단한 의료기술은 없지만, 일상의 자질구레한 문제(병)을 해결하며, 병과 의료와 사람을 둘러싼 관계를 바꾼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소개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한국 의료의 숨은 꽃은 한의원이 아닐까? 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체했을 때나 담이 올 때마다 한의원에서 받았던 침과 뜸이 그리워진다. 서양 의학의 처방전이 시원하게 긁어주지 못하는 일상의 병일수록 더 그렇다. 아직 팔팔한 때인 나도 이런데, 비 오는 날 무릎이 쑤시는 어르신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언젠가 아는 지인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젊었을 때는 병원에 잘 가지도 않으면서 의료 보험비를 꼬박꼬박 내야 하는 게 아까웠는데, 노령이 되신 어머님이 저렴한 가격으로 동네 한의원을 사랑방처럼 드나드는 것을 보고서야 무릎을 탁 쳤다는 것이다.

부황 치료를 받고 있는 쿠바인들. 한국인 한의사들이 종교 봉사활동을 와서 주최한 행사다. (제공=김해완)
부황 치료를 받고 있는 쿠바인들. 한국인 한의사들이 종교 봉사활동을 와서 주최한 행사다. (제공=김해완)

노년은 생명이 내리막길을 타는 시기다. 이때 내리막길의 각도가 얼마나 완만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마지막 스테이지의 난이도가 결정된다. 그런 의미로 어르신들이 비교적 간편하게 고통의 짐을 덜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축복이다. 신체가 회복능력을 잃어버린 상황이라면 독한 약물 치료나 부담스러운 수술이 늘 해답인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동네 한의원이 있다면, 쿠바에는 동네 꼰술또리오가 있다. 이 두 공간의 차이점이라면 침과 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이 주로 찾는다는 점, 그리고 고통을 덜기 위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닮았다. 아침에 꼰술또리오 대기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손녀가 끌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계시고, 아직 정정하신 분들은 홀로 오신다.

이곳에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특별한 의료 기술은 없다. 응급 환자를 위한 약도 때때로 부족한 쿠바인데, 꼰술또리오에서 처방전을 받는다고 해서 일반 약국에서 약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노인들은 습관처럼 꼰술또리오에 온다. 습관처럼 혈압을 재고, 몸무게를 체크하고, 청진을 요청하고, 일상의 조언을 구한다. 인생의 내리막길을 조금 더 완만히 내려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독거노인들 중에는 속 썩이는 아들내미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찾아오는 분들도 있는데, 이마저도 예방 의학에서는 심리적 치료로 간주한다. 대화보다 더 빠른 화병 예방책은 없기 때문이다. 가족주치의는 이 여정에 동행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야 한다.

꼰술또리오에서 당직을 서면서 수많은 노인들을 마주하기를 이 년 째, 어느 날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화와 돌봄에 주력하는 꼰술또리오에서 침과 뜸까지 뜬다면 어떨까? 만약 꼰술또리오에서 수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노인을 모시는 가족들에게 간단한 혈자리를 교육시켜서 자가 치료를 권장하는 방향은 또 어떨까? 어르신들의 발걸음도, 가족주치의의 어깨도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제공=김해완)
(제공=김해완)

전통의학과 쿠바 의료시스템의 목적 사이에는 공명하는 지점이 많다. 우선, 비용이 저렴하다. 물론 침구와 뜸기도 전문성을 띨수록 가격이 올라가지만, 그 가격의 폭이 서양 의학의 의료기기에 비할 바는 아니다. 늘 적자에 시달리는 쿠바 의료의 입장에서는 대환영할 일이다. 또 기구가 크지 않기 때문에 들고 다니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왕진을 나가는 가족주치의가 가방에 쏙 집어넣을 수 있는 사이즈다.

침구와 뜸기 뿐인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찜질용 팥주머니 같은 물건도 쿠바 어르신들 사이에서 인기가 폭발할 물건이다. 실제로 나는 쿠바에 처음 왔을 때 생리통에 활용할 목적으로 전기로 충전하는 찜질돌을 가져왔었는데, ‘마법의 돌’과 다름없다며 다들 크게 놀라워했다. 이런 물건을 상상하지 못해서 그렇지, 한 번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면 쿠바인들은 자체 제작에 돌입할 것이다. 이들의 창의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두 번째 장점은 전통의학의 치료법이 일차 진료의 예방법에 활용될 잠재력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의학이 전문성이 떨어져서 중증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상생활에 더 쉽게 스며들기 때문에 그만큼 초기에 적극적인 조치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가령, 체기가 있는 환자가 병을 치료하려면 꼰술또리오로 의사를 찾아가야 하고, 의사가 준 처방전을 들고 약이 있는 약국을 찾아 다녀야 한다.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체된다. 그러나 만약 기본적인 혈자리를 알고 있으면 지체 시간 동안 족삼리, 합곡, 곡지처럼 몇 군데부터 마사지할 수 있다. 약초에 대한 지식도 이 경우에 도움이 된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만 갖춰도 늘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는 가족주치의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세 번째 장점은 교육의 가능성이다. 서양 의학의 치료법은 병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병원에 직접 가야하고 의사를 직접 만나야 한다. 예방에 초점을 맞추는 쿠바 의료는 생활 습관 개선에 더 무게를 둔다. 식생활 개선, 운동, 위생 관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전통 의학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체질’의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에 더 세세한 개입이 가능하다.

실제로 쿠바 의료계는 ‘MNT(Medicina Natural Tradicional)’라고 줄여 부르는 전통의학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이 관심은 피상적인 대안 의식이 아니라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쿠바 의학의 뿌리는 서양 의학이다. 서양 의학은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탈피에 탈피를 거듭해왔다. 심장을 이식하고 난자를 냉동 보관하는 일은 한 세기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는 치료였다. 그러나 이런 혁신적인 치료는 그만한 물질적 번영과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될 때에만 가능하다. 쿠바의 문제는 이 전제 조건을 마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랜 봉쇄 속에서 경제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의료 인프라는 하루하루 낡아가고 있다.

반면, 전통의학은 근대화되기 이전의 소박한 삶과 밀착해서 발달해왔다. 비교적 많은 물자가 필요치 않다. 그렇다면 근대적 생활환경을 구축하는데 실패한 장소에서 전통의학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 위에서 짚어낸 세 가지 공명 지점처럼 말이다. 만약 쿠바가 과거의 지혜를 현재의 위기에 적용하는 법을 익힐 수만 있다면 그 결과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뜨거운 관심은 아직 뚜렷한 결과물을 맺지 못했다. 대부분의 쿠바 의사들에게 전통의학은 여전히 먼 미지의 세계다. 중의학을 발전시켜온 중국처럼 쿠바가 유럽과 별개의 문명에 뿌리를 둔 것도 아니고, 페루나 멕시코처럼 자기들만의 자연의학을 간직한 원주민 커뮤니티가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쿠바는 백지 상태에서 기초부터 배우겠다는 학구적인 태도로 전통의학에 접근하고 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의지만큼은 강하다. 아시아의 전통의학부터 라틴 아메리카의 약초, 인도의 요가, 플라워 테라피처럼 서양에서 갈라져 나온 신진치료법까지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가령, 의대의 경우에는 1학년 때 MNT 수업을 열어서 다양한 종류의 전통의학들을 소개한다. MNT만을 다루는 전문의 과정도 있고, 그 외에 마취과, 내과 치과, 피부과, 안과, 소아과, 정신과, 신경과 등등의 다른 분야에서도 MNT와 연계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Balneario de San Diego)는 피부과에 MNT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예시다. 이 건물은 혁명 전부터 스파를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혁명 이후에는 뽈리끌리니꼬와 오스삐딸로 탈바꿈되었다. 그러나 다른 의료 기관들과 달리 이곳에서는 자연 치유법 개발에 주력했다. 가장 유명세를 떨쳤던 것은 스파와 진흙을 통한 피부병 치료였다. 이 센터가 위치한 삐냘 데 리오(Piñar del Río)는 아름다운 자연 경광으로 유명한데, 특히 이 지역의 강물에는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센터는 특별시기를 거치면서 관리 부족으로 인해 점점 손상되다가 2008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고, 복구 과정을 거쳐서 2014년에 재개시했다. 지금은 침, 뜸, 장애인 재활치료까지 함께 겸하고 있다.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의 풍경. 침술실, 재활실, 스파가 다 따로 구별되어 있다. (제공=김해완)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의 풍경. 침술실, 재활실, 스파가 다 따로 구별되어 있다. (제공=김해완)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의 풍경. 침술실, 재활실, 스파가 다 따로 구별되어 있다. (제공=김해완)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의 풍경. 침술실, 재활실, 스파가 다 따로 구별되어 있다. (제공=김해완)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의 풍경. 침술실, 재활실, 스파가 다 따로 구별되어 있다. (제공=김해완)
발네아리오 데 산디에고의 풍경. 침술실, 재활실, 스파가 다 따로 구별되어 있다. (제공=김해완)

 

전통의학에 대한 관심은 제약 산업과도 직결되어 있다. 쿠바에 자생하는 식물에 무슨 치유력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에 대한 지식을 가장 풍부하게 갖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쿠바 사람들, 특히 노인들이다. 이들은 손자 손녀들이 배탈 났을 때, 혹은 감기에 걸렸을 때 무슨 풀부터 써야 하는지 알고 있다. 포르투갈 열대 지방 연구소에 속해있는 마달레노(I. M. Madaleno) 박사는 아바나에 거주하는 47가구를 인터뷰한 후 쿠바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약초로 총 여덟 가지를 정리해냈다. 감기에는 린덴 차(Té de Tilo), 설사에는 캐모마일, 복통에는 민트, 피부 감염에는 알로에, 중이염에는 오레가노, 치통에는 로메리요(Romerillo), 열증에는 샐비어, 항염 작용에는 카이시몬(Caisimon) 풀이 흔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감기에 걸렸을 때는 레몬, 꿀, 럼을 섞어서 원샷하고 푹 자라는 지극히 쿠바다운 조언이나, 피부 발진에는 과일 과야바 이파리로 목욕하라는 열대지방의 흔한 조언도 돌아다닌다.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물질인 PPG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신약을 개발했듯이, 이런 민간요법이 쿠바 연구진의 손길을 거쳐서 언젠가 공식적인 치료법으로 재탄생할지도 모른다. 쿠바 의료는 경제 봉쇄에 발목 잡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오래된 미래’로 돌아갈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국경이 봉쇄되더라도 어떻게든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에 안테나를 세워야 한다.

실제로 저 앞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미래가 그리 밝아보이지가 않는다.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화려하게 서막을 알렸다. 봉쇄를 당한 쿠바는 역설적으로 안전하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에도 점점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만큼 안심할 수가 없다. 쿠바에 원체 천식 환자가 많은데다가, 인구의 다수가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제3세계보다 국가 통제력은 훨씬 더 뛰어나겠지만, 이곳에서 보게 될 죽음까지의 거리는 중국이나 한국보다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가 옆 나라 아이티나 자메이카로 퍼진다면 우리는 또 차원이 다른 파괴적인 사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쿠바 의료진은 벌써부터 본격적으로 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18세기 쿠바에서 쓰이던 오래된 외과용 메스들. 이런 흔적들이 쿠바가 기억하는 ‘서양 전통 의학’의 전부일 것이다. (제공=김해완)
18세기 쿠바에서 쓰이던 오래된 외과용 메스들. 이런 흔적들이 쿠바가 기억하는 ‘서양 전통 의학’의 전부일 것이다. (제공=김해완)

어쩌면 우리는 과학과 함께 눈부시게 올라간 만큼, 더 가파른 내리막길로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로부터 답을 구할 수도, 미래에서 무엇이 오는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늘 고군분투하면서 길을 찾는 쿠바의 모습이 한국에 한 줄기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한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께, 내게 개인적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신 아바나 의대 교수님들과 함께 힘내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동네 사랑방에 모여서 서로의 평범한 고통을 나누는 일상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는다.

 

김해완(쿠바 아바나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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